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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덫 - 이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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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덫 - 이우현

입력
2004.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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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포획틀로 다가온다. 녀석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프라이드치킨의 유혹으로 인해 이미 경계심이 무뎌졌다. 그렇고 말고.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최상의 미끼다. 고양이는 날것은 먹지 않는다. 생선을 물고 있는 고양이의 이미지는 거짓이다.간밤에 아이의 학교 선생이 전화를 했다. 상냥한 여자였다. 여자는 인사 몇 마디를 한 뒤 아이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아이가 생활기록부의 아버지 직업란에 고양이 사냥꾼이라 기입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나는 미끼로 사용할 닭다리에 양념을 묻히던 중이었다.

“선생님, 고양이를 죽이거나 내다 파는 게 아니라 시 당국의 공식 의뢰를 받아 활동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이해시키기가 어려워요. …네, 그런 것 절대 아닙니다.”

고양이는 양념이 고루 묻어있어야 더욱 좋아한다. 녀석들은 영리하지만 의외로 지극히 단순한 편이기도 했다. 한 번 풀어준 자리에서 또다시 잡혀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녀석들의 생리를 파악한 이후로 하룻밤에 몇 마리는 거뜬히 잡을 수 있었다. 다섯 마리를 넘기면 풀어줘야 할 정도였다.

엄밀히 말해 녀석들은 도둑고양이요, 배회고양이다. 배회고양이든 들고양이든 모두 구제대상으로 지정됐다고는 하지만 본래 주택가에 사는지 밤마다 산에서 내려오는지 알 길 없어 모두 잡아 죽일 수는 없다. 동물보호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열혈 보호단체가 항의를 하기 때문이다. 나로서도 죽이는 편보다는 병원에 가져다주는 편이 낫다. 불임수술을 시키고, 귀에 인식표를 달아준 다음 풀어주면 되는 일이다.

녀석은 꽤 용의주도하다. 한 시간 전 포획틀 입구에 영역표시를 하고 사라진 뒤 다시 나타난 것이다. 거리에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라고는 녀석과 나 둘 뿐이다.

녀석이 서서히 포획틀 안으로 앞발을 들여놓는다. 녀석의 등, 엉덩이, 기다란 꼬리가 서서히 틀 안으로 들어간다. 녀석은 조심스럽게 앞발로 닭다리를 살살 건드려 본다. 닭다리가 움직이자 입구가 닫혀버린다. 놀란 녀석이 사방으로 달려들며 탈출을 노려보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나는 보다 침착하게 기다린다. 5분만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다.

가방에서 얇게 저민 닭고기를 담은 봉지를 꺼내 양을 확인한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쯤에서 파해야겠다. 도구들을 챙겨 차에 싣는다.

나는 평소에도 굼뜬 편이지만 포획을 나설 때면 더욱 행동이 차분해 진다. 굳이 재빠른 행동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동작은 오히려 고양이를 쫓는다. 과장된 동작은 누가 이편을 봐주길 바랄 때나 하는 외로운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고양이도 그 사실을 안다. 녀석들은 혼자 다니는 것 같아도 언제나 무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발정할 때를 제외하고 여간 해서는 요란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녀석들은 대체로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녀석이 잠잠해졌다. 녀석에게 다가가 묵묵히 틀을 들어올린다. 녀석이 한편으로 잽싸게 움직인다. 그 투덕거림이 손잡이를 쥔 손으로 전해져온다. 나는 이 순간 쾌감을 느낀다. 도도한 녀석일수록 움직임은 작지만 힘찬 것이다. 입구가 열렸을 때 단 한 번의 필살기라도 날릴 요량으로 녀석들은 힘을 끌어 모으고 그 순간의 떨림을, 나는 손맛으로 느낀다. 낚시의 손맛보다 강한, 필사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야생의 생명력에는 특유의 리듬이 있고 그래서 아름답다. 덩달아 힘이 넘친다. 칠팔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수의사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 나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본격적인 창업 준비를 시작했고 선배의 도움으로 좋은 목을 얻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이지 내 앞에 성공만이 놓여있는 것처럼 생각됐다. 아내도 무척 들떠 있었다. 새 천년을 맞이해 개업했던 우리의 ‘밀레니엄 애견센터’는 육개월 만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일이 잘 되는 것도 망하는 것도 모두가 한순간이었다.

포획한 고양이를 병원으로 데려가 중성화수술을 시킨 뒤 풀어주면 계산은 끝난다. 시에서는 마리당 이만 오천원을 쳐준다. 시에서 지정한 병원은 하루 다섯마리 이상 수술할 여력이 없다. 시의 예산도 넉넉하지 않다. 나는 주 3회 도합 마흔 다섯 마리의 고양이만 잡는다.

암놈은 자궁과 난소를 들어내고 수놈은 고환을 제거한다. 수놈의 경우 마취를 안 시키는 경우가 많다. 회복력이 다른 동물엔 비해 월등히 빠르다는 등 수의사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예전에 애견센터를 하셨다죠, 라는 확인도 빼놓지 않는다. 고양이 잡는 일의 수익도 늘 궁금해 한다. 중성화 수술비로 벌어들이는 돈이 내 수입의 몇 갑절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도 알 텐데, 고약한 습성이다.

거세나 불임수술을 당한 고양이들은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진다. 발정기가 없으니 자연히 온순해지고 아기처럼 울어대는 소리는 사라져 버린다. 교미를 해야만 한다는 스트레스가 없어 낙천적인 성격으로 변한다고들 하는데, 과연 그럴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이달의 목표량은 다 채웠다. 처음 포획한 자리로 돌아가 수술을 마친 고양이들을 풀어주고 나면 오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아이가 오전반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시각이다.

아이는 엄마를 찾는 전화를 끔찍이 싫어한다. 근래 들어 아내를 찾는 전화가 잦아지면서 수화기를 들고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끝내 욕설이 오가고 말았던 탓이다. 아내 앞으로 날아오는 우편물도 부쩍 늘었다. 카드회사, 법원, 보험회사, 아내는 언제부터 빚을 지고 살았던 걸까.

“김미현 고객님과 통화할 수 있겠습니까? 이달까지 납입하시지 않으면 저희도 법원에 고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듣고 계십니까? … 남편 분이 책임을 꼭 지셔야 하는 건 아니지만, … 그건 저희 회사 소관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제 할 말만 해놓고는 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도 예의는 차리는 편이었다. 아내는 카드연체를 대납해주는 곳과도 거래를 튼 모양이었다. 말이 대납이지 고리대금에 선이자를 떼먹는 치들이었다. 그들은 곱게 말하지 않았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일이천도 아니고 일억에 가까운 큰돈을 도대체 어디에 쓴 것일까. 그 중 내가 알고 있는 온전한 빚은 은행융자 뿐이었다. 애견센터를 차릴 때 얻어 쓴 삼천만원이었다.

아내와 함께 가구와 조명기구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던 겨울, 아내는 장갑도 없이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불었다. 연애시절 선물한 흰 목도리가 전부였는데도 아내는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아내는 따듯한 색감의 벽지에 맞춰 파스텔 톤 녹색 가운을 사면서도 자신의 것은 사지 않았다. 개업과 더불어 아내의 것으로 장만한 것은 미용가위와 슬리퍼, 앞치마뿐이었다.

나는 점심상을 차리기 전에 숫제 전화 코드를 뽑아버렸다. 아내의 행방을 알려주기보다는 우리의 불행을 재확인시켜주는 괴물처럼 보였다. 장식장을 닦아가던 아내의 손은 마르티스 종의 눈물 고인 눈망울처럼 투명했다. 개업을 앞둔 일주일, 재료 상으로부터 물건을 받아들 때 아내는 전쟁놀이를 하는 꼬마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돈 쓰는 데 순진하리만큼 겁을 집어먹던 아내가 어떻게 수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배짱 좋게 쓸 수 있었을까. 아내와 맞잡았던 내 손을 내려 본다. 아내의 손은 이미 그 때에 피혁처럼 상해있었고, 내 손은 그동안 아내처럼 상해버렸다. 아이가 돌아와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밥상을 차리고, 고양이 포획에 쓸 재료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대형 할인마트는 도서관보다 몇 갑절 복잡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카트를 밀며 매장을 누비는 사람들에게 질서란 없다. 카트의 앞부분을 남보다 먼저 들이밀면 되고 힘껏 밀어내면 그뿐 사람들은 화를 내도 금세 잊곤 한다. 5킬로그램 튀김가루와 10리터들이 식용유를 카트에 싣고 정육 코너로 접어드는데 은근하게 피 냄새가 밀려온다. 찌개용 사태를 산 뒤 닭고기 냉동육을 판매하는 매대 앞에 선다. 부위별로 묶인 봉지를 이것저것 들어보며 제조일자와 무게를 비교한다. 암놈은 날개를, 수놈은 다리를 좋아한다. 이러한 유의 얘기들. 아내가 좋아했을 지도 모른다.

딸아이를 위해 스틱형으로 만들어진 튀김용 제품을 찾아 카트에 싣는다. 끝으로 들릴 곳은 야채 코너, 이곳 할인 마트의 야채 코너는 하루 지난 상품은 절대 팔지 않기로 유명하다.

아내와 더불어 채식을 시작했을 때 장을 보러 온 곳도 이 할인 마트였다. 나는 아내가 권하는 대로 달래와 쑥을, 된장국과 무침으로 입맛을 들였다. 아내는 묵을 내놓거나 나물류, 버섯 등의 요리를 한 가지씩 배워 입맛을 돋우어 주었고 이따금 해초를 이용해 튀김을 만들거나, 작고 가늘게 묶어 초장에 찍어먹는 별미를 내놓기도 했다. 그들 채소와 어울리는 것은 현미밥이다. 소화가 잘 안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씹는 맛이 있었다.

야채 코너로부터 계산대로 향하는 사이 고사리와 우엉, 연뿌리 등을 균일가로 판다며 판매원 여자가 앙칼지게 소리를 친다. 아내가 특히 좋아했던 것들이다. 아내는 생으로 씹어 먹어야 고소하다며 찍어먹을 장을 찾는 내게 핀잔을 주곤 했다. 판매원 여자는 내가 밀고 온 카트를 쳐다보더니 보는 눈 있으시다 며 호들갑을 떤다. 여자는 유기농 상품의 우수성에 대한 선전을 시작한다. 어디선가 묵은 햄버거 냄새가 풍겨온다. 비료를 안 쓰고 인분을 쓰냐고 묻고 싶지만 참는다.

여자는 분무기를 들어 자신의 채소에 골고루 뿌려댄다. 코끝이 간지럽다가 외려 맑아진다. 여자로부터 암고양이 냄새가 난다. 아내의 화장품 냄새도 난다. 여자에게 마취를 한 다음 바닥에 눕힌 후 아내가 있는 곳을 물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혼자 웃음을 짓고 만다. 아내는 특가상품이니 균일가이니 붙여놓은 매대에서도 값을 깎느라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그럴 때면 늘 침착하게 조곤고곤한 말투를 구사했다. 상대 판매원에게 최면이라도 걸 듯 아내는 정성스레 공을 들여 값을 깎았다. 값을 깎는 주문, 나는 아내의 목소리를 그렇게 칭했다.

나는 서둘러 암고양이 여자로부터 마트로부터 빠져나온다.

아내가 내게 그랬듯 나도 고양이들에게 채식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이번 주에도 놈들은 내게 삼십 칠만 오천 원을 입금시켜주는 수입원이므로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미끼에 색다른 소스를 입혀주는 건 어떨까.

놈들의 주 이동경로는 골목에 주차된 차량 밑이다. 차량의 크기와 집 앞의 쓰레기의 양에 따라 고양이의 서열과 크기가 갈린다. 생활쓰레기에 섞여 나오는 음식들이란, 어차피 그날 하루 동안의 음식이므로 상한 음식은 없다. 놈들은 상한 음식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아파트 현관을 들어설 때 식용유통을 든 오른 손목이 시큰하다. 통을 잠시 내려놓고 허리를 한 번 곧게 편다. 입안이 바짝 말라 한 입 베어 물면 수분이 물씬 새 나올 무나 오이가 그립다. 이번에는 왼손으로 식용유통을 틀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한달음에 빠른 걸음을 옮긴다. 빨리 집으로 들어가 편히 눕고 싶다. 무엇이든 대강 입에 물고 녹즙을 빨아먹고 싶다.

엘리베이터는 팔층부터 사층까지 고루 한 번씩 멈춘 뒤 일층으로 왔다. 정작 내리는 사람은 사내 한 명 뿐이다. 닭고기 냉동육을 담은 비닐봉지 표면으로 물이 맺혀 흐르기 시작한다. 한발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도록 막아선 다음 식용유통을 먼저 들이고 그다음 나머지 것을 들인 뒤 안으로 들어선다. 지린내가 진동한다. 고양이나 개 오줌이 아니라 사람 것으로 짐작이 간다. 잠시 호흡을 참는다. 불과 몇 초만 지나면 될 일인데 그 순간이 몹시 길게 느껴진다. 아내가 사라진 날에도 그랬다. 나는 어쩌면 집을 나서는 아내를 막거나 만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의 오르내리는, 몇 초간의 시간차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이 어색하다고 느끼던 순간, 아내는 사라져 버렸다.

십일 층에 이르자 잠시 기우뚱거리는가 싶더니 둔중한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식용유통을 오른 손에 나머지 짐을 왼손에 들고 복도로 내려선다. 집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휴대폰이 울린다. 짐을 내려놓는다. 선배였다. 돈이 월요일에 입금될 거라 전한 선배는 내일 시간 있느냐며 산에 한 번 가자고 한다. 나는 만나서 가는 것보다 올라가서 만나자고 한다. 그 편이 성가시지 않을 듯싶다.

1103호 문이 열리더니 웬 여자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나선다. 습관적으로 여자보다 고양이에 먼저 눈이 간다. 실버 앤 골든 디비전 종의 페르시안 고양이다. 푸른 눈의 녀석은 성격이 매우 얌전해 아파트에서 키우기에 적당한 종이다. 별명이 소파고양이일 만큼 온순하다, 고 되뇌는 순간 녀석이 제 주인의 팔에서 빠져나온다. 고양이의 착지는 언제 봐도 경이롭다. 녀석은 곧장 내게로 달려들려다 급히 멈춰 선다. 꼬리를 곧추 세우고 입을 벌려 공격신호를 보낸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낮춘다. 적당한 높이에서 겁을 주면 고양이는 물러서기 마련이다. 사실 놈들이 우습게 보는 것은 두 발 짐승이다.

여자의 손에 들려 품으로 올라갈 때 녀석은 이미 기가 죽어 있다. 죄송하다며 여자가 사과를 연거푸 한다. 귀여운 친구가 옆집에 사는 줄도 몰랐군요, 하고는 고양이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어준다.

애완용 고양이에겐 도둑고양이의 야성이 없다. 수십 대에 걸쳐 길들여졌기 때문에 심연에 숨어있을 야성이란 웬만해서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정 교육을 받은 자에게 야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현관문을 열자 아이가 반갑게 맞는다. 아이에게 튀겨 줄 닭고기를 보여준다. 사실 아이는 닭다리에 관심이 더 많다. 아빠의 프라이드치킨이 세상에서 최고란다. 나는 짐을 푼 뒤 가스레인지에 기름부터 올려놓는다.

물을 마셨는데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잘 씻어둔 당근이 눈에 띤다. 황급히 그러나 씹는 맛을 음미하면서 당근을 베어 물고 아이가 어질러둔 거실을 정리한다.

아내는 왜 카드빚을 졌을까?

남태령길을 걷다 보면 서울과 과천의 경계를 지나치게 된다. 하루에도 수 만대의 차량이 이 고개를 통과한다. 한 번 막히기 시작하면 고속도로에서나 볼 수 있는 간이 장사꾼湧?등洋歐竪?한다. 경계를 넘어서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예전에는 이 길도 고즈넉한 편에 속했다. 아내와 함께 걷던 때만해도 그랬다. 차선이 확장되고, 오가는 차가 많아지고, 도로가 낡아져 가면서 나도 아내도, 우리가 살고 있던 도시도 변하고 있었다.

아내의 행방을 떠올리다가 작년 봄 무렵의 학습지 사건을 떠올린다. 애견센터를 개업한 지 육 개월 쯤 되었을 때였다. 은행융자에 대한 이자만 겨우 갚아가던 시기였고 아내에게 말을 꺼낸 적은 없으나 너무 성급했던 것이 아니냐는 자책을 하던 때이기도 했다.

벌여 놓으니 거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학습지 박스세트가 괴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나는 아이 앞이라 뭐라 할 수 없어 아내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아내는 너무나도 앞뒤가 착착 맞도록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옆 동에 사는 아내의 동창이 있는데 그 친구네 아이가 조기유학을 간다는 것이다. 마침 막 선물로 들어온 학습지 세트가 있었고 또 마침 아내도 아이에게 학습지를 하나 선물하려던 참이었단다. 보시다시피 새것과 다름이 없어 예의를 차릴 만큼의 사례는 해야겠기에 자신은 그 집 아이에게 옷 한 벌을 사주었다고 했다.

그 옷은 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묻자 아내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그래, 그때였다. 아내에게도 카드를 만들 자격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때는. 그리고 그때 눈치 챘다. 아내가 곧 탄로가 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내는 그만큼 순진했다.

아내는 아이를 시켜 마치 헌 것을 물려받은 양 교재 여기저기에 낙서를 하고, 결코 닳아서 떨어지거나 제본이 잘못돼 떨어질 리 없는 페이지 몇 장을 뜯어놓기도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아챘으나 알은 척 하지 않고 넘겼다. 그리고 다음 날 은행에 전화를 걸어 아내 명의로 된 카드의 해지를 요구했다. 본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해 몇 번 실랑이를 거듭하기도 했다.

그놈의 카드회사 직원들을 고양이처럼 모두 포획할 수는 없을까. 놈들처럼 중성화수술을 시키면 잠잠해질 텐가. 아내를 사라지게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이 아닌가. 숱하게 공상을 해봤지만 그닥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고양이를 포획하는 방법이 자리를 잡기 전에는 오히려 도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의 씨를 말릴 양 도살했는데도 오히려 고양이의 세가 급증한 것이다. 특정 구역을 장악하고 있던 고양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주변에서 중심부를 차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두세 마리가 진입한 것. 녀석들은 권좌를 놓고 기나긴 날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이다 오히려 세력을 규합, 구역을 나눠 갖는 계약을 맺어 오히려 그 수가 도살 이전보다 몇 배로 늘었다. 당연히 도살 책은 중단됐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때가 이 년 전이었고 당시 내게 포획을 권했던 사람이 바로 선배였다. 유일한 조력자이며 애견센터가 문을 닫자 이 일을 적극 추천해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봐라. 주말만 되면 청계산이 이렇게 미어터진다. 다들 내 또래이거나 오십 바라보는 사내들뿐이야. 좋아서 등산 나오는 게 아니다. 마흔만 딱 되어도 주말 되면 갈 곳이 없다 이거야. 애새끼들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마누라와는 영영 안녕이야. 왜? 왜 이 사람들이 일루 나오는지 아냐? 돈 안 드는 운동이잖아. 요즘 가장 인기 좋은 게 등산이랑 조깅이라더라. 조깅은 무슨 두세 시간씩 뛰는 게 어디 조깅이냐 마라톤이지. 이러고 집에 돌아가도 애 공부한다고 티브이도 못 보게 해요. 밤에 자려고 누우면 애 학원에서 실어오라 해요. 너도 나도 있으나 없으나 학원이고 과외고 시켜대니 애들은 애들대로 죽어나고 가장들은 가장들대로 엄마들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온통 전쟁터야. 네 딸내미도 초등학교 들어갔다 했지? 금방이다. 금방 중학교 가고 금방 고등학교 간다. 그 전에 재취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또 그 소리다. 선배는 지난겨울부터 결혼 타령이었다. 나는 등산로가 훤히 보이는 바위 편으로 가서 꾸역꾸역 서로 떠밀려 올라오는 인파를 바라본다. 마치 출퇴근시간대의 신도림역 같다. 그들을 뒤에서 밀어줄 이를 고용해야 할 정도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며 선배가 손짓을 한다. 중턱에 이르자 여남은 사내들이 둘러앉아있다. 선배가 몇 남자와 악수를 나눈 뒤 나를 소개시켜 준다.

"어허, 여기 오기에는 아직 젊은 양반인데요."

한 사내가 호기를 부리며 웃어댄다. 이들의 화제는 밑에서 선배가 한 말의 반복이다. 다들 달려올 만큼 달려온 사람들인데 반환점도, 골인지점도 없다는 말. 대통령 후보만 보톡스를 맞는 게 아니라는 말. 다들 몇 천만원정도의 빚을 안고 살아간다는 말. 그래도 아내가 집을 뛰쳐나갔다는 소리는 없다.

요령을 익혀도 많이 익힌 모양인지 몇 사내는 수통에 소주를 담아오기도 했다. 수통이 몇 순배 돌아갈 무렵 나는 문득 시체가 썩는 듯한 악취를 맡았다. 잠시 어지럼증이 일었다. 속이 불편해 사내들이 앉아 있는 반대편으로 가 심호흡을 몇 번 해본다.

아래쪽에서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올라오고 있다. 두 사람 사이로 슈나우저 한 마리가 바쁘게 오가고 있다. 등 뒤에서 호기 부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애완견 입산금지 못 봤소? 벌금이 오십 만원이랍디다. 여기 공무원 양반도 있는데 어떻게 할 거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꼭 지키겠습니다."

앉은 사내들이나 올라오던 부부나 서로 웃자고 하는 수작이었지만 의외로 형형한 분위기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서로가 못마땅한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묵은 햄버거 냄새가 풍겨나기 시작했다. 도둑고양이들이 숨어 있는 자리에서나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산을 내려오는 중에도 그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냄새가 뒤섞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꾸역꾸역 밀려 오르던 울긋불긋한 등산모의 행렬을 떠올리자 땀내가, 홀아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무리 지어 앉아있던 사내들에게서 찌든 소주 냄새가, 슈나우저와 중년부부에게서 왠지 모르게 국화꽃 향이, 이미 오래 전부터 내 몸을 뒤따르던 묵은 햄버거냄새와 한데 뭉쳐 또 다른 냄새를 혼합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취(尸臭)였다.

"긍께, 이때까 남편분이 실종신고를 안해분 것두 글지만 카드사에서 수사의뢰를 했응께 우리는 찾아봐야 볼 수밖에 없재라. 갸들이 왜 글케 몸이 달았냐믄요. 긍께 이런 말을 해도 될랑가 몰르겄는디 김미현씨가 신용불량자 중에서 구제대상이라 하드만요. 법적으로는 혼자라 합디다. 아도 딸리고, 잘은 모르겄는디 마누라, 아니 부인께서 참 잘해부럿당께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나는 담당 형사라는 사내의 전화를 받고 포획틀을 만들던 중 내팽개친 채로 경찰서로 달려왔다. 김 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늦은 아침을 먹는다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오전 열한 시 치고는 꽤 한산한 풍경이었다.

"제 아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김 형사는 대답은 않고 한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벌건 얼굴로 설렁탕을 들이붓듯 먹는 그에게 뭐라 더 물을 말도 없어 그냥 나와 버렸다. 아내가 카드빚 때문에 사라져버린 거라면 이젠 돌아와도 된다는 뜻처럼 들렸다. 아니, 얼마가 되었든 내가 갚아주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법적으로 혼자라는 말이 귓가에서 한참을 맴돌았고 아내와 처음 애견센터를 차리려 돌아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융자를 끌어안고 가게를 덜컥 연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선배가 점찍어준 자리였는데도 위험부담이 컸다. 한편 아내는 억지로라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내가 그런 경우는 처음이어서 나는 더욱 선택하기가 힘들었다.

계약을 마친 사람은 아내였다. 일단 인건비는 굳히고 시작하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오히려 아내가 나를 달랬다. 선배가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놀라울 만큼 쉽게 융자를 받아오기도 했다. 그때는 분명, 아내가 모든 것을 주도했다.

나는 애견센터 자리를 찾아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아내가 철없이 카드를 남발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아내가 어딘가에 숨어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상상도 해보았다. 아이가 엄마를 애타게 찾지 않는 이유도 새삼 궁금해졌다. 아내가 내 능력을 시험해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더 잠잠해지면 나타나려는 계획이 아닐까.

새로 완공된 아파트 덕택에 애견센터가 자리했던 건물 주변으로 비슷한 크기의 건물이 대여섯 개 세워져 이제는 상가단지를 이루고 있었다. 도로 양옆의 플라타너스도 적당히 키를 키웠고 무엇보다 지하철 공사도 마무리 단계여서 이곳은 점차 금싸라기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애견센터 자리에는 한의원이 들어섰고 옆 자리에 있던 부동산과 철물점은 한데로 합쳐져 이동통신 대리점으로 둔갑해 있다. 아내가 자주 들르던 아동복 가게만 유일하게 예전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길을 건너 아동복 가게로 다가갔다.

출입을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는데도 주인여자는 나오질 않았다. 나는 천천히 가게 안에 걸린 아기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에게 분홍색을 입히길 원했고 아내는 사내아이에게나 어울릴 법한 짙은 파랑을 택하고는 했다. 요즘 남녀구분이 어디 있냐며 아내를 거들던 주인여자가 그때는 참 얄밉게 보였다. 아이용 식기도 눈에 띄었다. 짧고 뭉툭한 숟가락, 바퀴가 달려 아이가 타고 놀 수 있는 일체형 식기, 아이를 가슴에 안아든 남편들의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며 아내가 내게 권하던 멜빵형 포대기도 그대로였다. 마치 삼년 전의 시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지금 문밖을 나서면 우리의 애견센터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다.

'아기 옷은 다음에 태어날 사내아이에게 꼭 물려줘야 하니까.'

아내는 아이가 훌쩍 커버려 맞지 않는 옷을 보관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아내는 신주단지 모시듯 아이의 옷을 옷장 한쪽에 잘 개켜놓았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뭘 시키는 게 좋겠냐고 내게 자주 물었고 얼굴만 아빠를 닮지 말라며 세상에 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주문을 걸기도 했다. 아내는 옷을 개키며 콧노래를 불렀다.

딸아이는 아기였을 때 침을 많이 흘리는 편이었다. 젖병보다 포대기보다 먼저 챙겨야 하는 것이 턱받이 혹은 손수건이었다. 아내가 자주 사용하던 유아용 손수건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을 집어 잠바주머니에 넣었다. 여전히 주인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머니에 질러 넣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거리로 나와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선배는 양천구에서 왔다는 환경과장을 친히 집으로 데리고 와 소개시켜 줬다. 이곳 과천시의 고양이 포획 모델이 상당히 모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다. 서울에선 오히려 고양이 파파라치를 양산할 공산이라며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고 했다. 선배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였다.

"우리 시의 경우 여러 주민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계획을 시작한 거였습니다. 처음에 이 계획을 세우고 적임자가 있느냐 고민하던 무렵이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턱 나타난 거죠. 이 친구 본래 수의사 출신에 애견센터도 운영한 경력이 있거든요."

마흔을 갓 넘겼을 법한 환경과장의 앞머리는 숱이 많이 빠져 있었다. 선배의 일목요연하고도 장황한 이야기가 계속되었고 그의 숱 없는 머리가 몇 번씩 고개를 끄덕였다.

"까놓고 말합시다. 이게 잘 돼야 과장님도 좋은 것 아니겠소. 이 친구 수입도 늘어나면 더욱 좋고. 안 그래, 닥터 황?"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장과 눈을 마주쳤다.

거래는 순탄하게 이뤄졌다. 저쪽에서 마리 당 할당한 가격은 이만 칠천 원인데, 석 달 간 만원을 얹어 주기로 했다. 나는 이곳에서 활동하는 삼일 외에 저쪽에서 이틀을 맡기로 했다. 기왕이면 양천구 측에서 붙박이로 고용할 한 사람을 위해 몇 주 데리고 다니며 견습 좀 시켜주라는 조건이었다.

고양이 포획은 각종 지방세를 납부하는 주민들의 후생 복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며 이용하기에 따라 공공근로사업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는 나보다 세상을 조금 더 바쁘게, 영리하게, 힘들게 살아온 선배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군더더기 없는, 공공의 명제인 것이다.

아동복 가게에서 돌아온 이후로 이틀 간 포획을 나서지 않았던 나는 서울로의 원정을 위해 새로운 틀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서울은 주택가의 도로가 좁을 것이고 빼곡하게 주차가 돼있을 것이므로 이곳에서 사용하는 것보다는 크기가 작아야 했다. 또 미끼의 수급도 용이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치킨이 통할까. 놈들의 취향을 살피려면 우선 그 동네의 생활쓰레기부터 뒤져봐야 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선배인가 싶어 문을 열었는데 엉뚱하게도 옆집여자가 서 있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여자의 부탁은, 지극히 사소한 이웃사촌의 그것이었다. 자신이 키우고 있는 고양이의 중성화수술을 하려 했는데 암컷이라 십오 만원을 달라고 하더라, 하시는 일이 고양이 불임을 돕는 일이라 들었다, 오만 원을 드릴 테니 자신의 고양이를 여느 도둑고양이처럼 맡겨 수술을 시켜 달라는 말이었다.

이럴 때 아내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니 이럴 때는 선배의 식을 따르는 편이 나았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생각해 보니, 찾으면 찾을수록 쉽게 돈 버는 일은 많았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파슬리를 접시에 평평히 늘어놓는다. 나는 단순한 드레싱을 좋아하지만 아내는 올리브기름을 좋아했다. 토마토를 곁들이면 한결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연출할 수 있다. 식탁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양초를 준비했더라면 더욱 좋을 뻔했다.

딸에게는 채식을 시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포크를 내려놓고 냉장고로 걸어가 며칠 전에 튀겨놓았던 닭다리를 꺼내든다. 고양이는 며칠 지난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튀김옷이 가장 크게 입혀진 다리를 들어 입에 넣는다. 육질이 너무 차가워 맛을 느낄 수 없다. 새 접시를 꺼내 닭다리를 올려놓고 전자레인지에 집어넣는다. 데움 버튼을 누른다.

전화가 걸려온다. 김 형사는 더듬거리며 아내의 사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나는 데운 닭다리를 씹어 삼키며 아내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파슬리를 손으로 집어 입 안에 털어 넣는다.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 약간의 소금과 케첩을 찾아 식탁으로 돌아온다. 그는 병원으로 싸게 오시라며 전화를 도망치듯 끊어버린다.

소파를 향해 수화기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다시 식탁에 앉는다. 소금을 찍어 먹어도 케첩을 찍어 먹어도 여전히 닭다리는 싱겁다. 혀가 육질을 기억해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전화벨이 다시 울린다. 전화를 받지 않고 두 개째의 닭다리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운다. 갈증이 나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페트병째 들고 마신다. 오래 된 사이다는 톡 쏘는 맛을 느낄 수 없다.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소파로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선배의 전화다. 저쪽에서 최근 포획 일지를 보자고 한다는데 이번 주 들어 한 건도 없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날씨 탓이라고 대답한다. 선배는 고양이가 그리 없냐고 묻더니 잠시 뜸을 들인 후 자신이 의왕시로 가서 열 댓 마리 실어오겠다고 한다. 좋을 대로 하라고 소리를 친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목소리를 끊어 버린다. 신경질적으로 코드를 뽑아 버린다.

아내가 즐겨 쓰던 손수건을 잠바 주머니에서 꺼내어 든다. 여전히 아내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방으로 돌아가 옷장에 잘 모셔둔 아기 옷을 하나씩 펼쳐 들고 한 손은 등을 받치듯 다른 한 손은 엉덩이를 받치듯 한 뒤 좌우로 천천히 흔들기 시작한다. 아내의 자장가를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나 차분하고 따스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옷가지를 마구 꺼내어 든다. 그때 몇 장의 종이들이 발 아래로 은행잎처럼 떨어져 내린다.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아 그것들을 찬찬히 살핀다. 그것은 은밀하게 숨겨져 온 아내의 비밀이다.

아내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다. 나 또한 영리하게 살기로 했으므로 아내는 곧 돌아올 것이다. 아내의 자장가 소리는 여전히 따스하고 차분하다.

초인종이 울린다. 중성화수술을 마치고 나면 옆집의 페르시안은 더욱 얌전해질 것이다. 소리 없이 움직일 테고 요란한 발정을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다. 어느 날엔가 죽음을 맞아 혹 가출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양이의 습성이다.[끝]

소설/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작품들은 ‘섬’ ‘늑대가 나타났다’ ‘경제학자 이야기’ ‘Che’ ‘長相思’‘달의 이빨’ ‘모란’ ‘오징어’ ‘오소리’ ‘덫’ 등 모두 10편이었다.

요즈음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작품들의 일정한 경향이 있는데 신변잡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아니면 주제가 약한 것을 보강하느라고 그러는지 설익은 관념을 과도하게 드러내거나, 저만 아는 실험적인 구성으로 읽는 이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소설 작법에 충실하기 만한 무난한 작품이나 주제와 관념만 노출된 실험적인 작품 모두가 아직은 손을 더 대어야 할 설익은 것들이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을 뽑는 데 단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한 작품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3편을 함께 거론하기로 하여 ‘오징어’ ‘오소리’ ‘덫’을 가려냈다.

‘오징어’는 공교롭게도 심사위원들이 지난해 모 신문의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라왔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남자의 외로움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오징어의 손질과 조리에 대한 자상한 묘사력이 돋보이면서도 전체 구성상 너무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오징어와 혼자 사는 이 사내의 고독과의 연결 고리가 너무 약한 것이 결정적인 흠이다.

‘오소리’는 헤어진 남자가 남기고 간 야생 오소리를 돌보고 있는 여자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묘사나 문장이나 치밀한 편인데 구성이 밋밋하고 어째서 오소리 이야기여야 하는지 주제가 애매하다. 그러나 당선권에는 충분히 들 만한 아까운 작품이었다.

‘덫’ 은 처음부터 심사위원 전원이 당선작으로 염두에 두고 나와 서로 만나자마자 칭찬을 아끼지 않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신용불량자와 임시직노동자가 수백만명에 이른 암울한 시대의 가족 붕괴를 담담하고 냉정한 필치로 그려낸 수작이다. 고양이를 포획하여 거세하는 일을 해나가는 과정과 카드 빚의 덫에 걸려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는 사내의 일상이 침착하게 중첩되면서 작품의 현실성이 탄탄하게 담지되고 있다.

가령 생존경쟁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의 암담한 분위기를 묵은 햄버거 냄새의 느낌이라고 복선을 깔았다가 그것이 시취(尸臭)라고 하고는, 뒤에 가서 가출한 아내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전화 한 통으로 이 복선을 완성해 내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다. 요즈음 현실을 이만큼 그려낸 작품은 기성 문단을 둘러봐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오랜만에 뛰어난 신인작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심사위원=김화영 황석영 오생근

소설/이우현씨 인터뷰

신춘문예 마감을 일주일 앞두고 이우현(29)씨는 편도선염을 앓았다. 고열에 시달리면서 그는 ‘이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달 남짓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응모작으로 준비해 왔던 터였다. 마감 이틀 전 오후 책상에 앉아 작품을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에 탈고했을 때 소설은 처음 썼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우현씨가 소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것은 군에 가서다. 공대를 지원했던 이씨에게 그때까지 문학 체험이라고는 교과서에 나온 작품이 전부였다. 다리를 다쳐 의무대에 누워있는데 공지영씨의 장편 ‘고등어’가 눈에 들어왔다.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황석영씨의 소설집 ‘객지’, 이문열씨의 장편 ‘여우사냥’, 윤후명씨의 소설집 ‘돈황의 사랑’ 등 50 여권의 소설을 읽고 제대했다. “소설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문예창작과를 지망했다. 그는 입학한 해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했고 5회 만에 당선됐다.

당선작 ‘덫’은 처음에는 ‘고양이와 인간의 반목과 갈등’이라는 내용으로 출발했던 소설이다. 작품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다가 고양이를 포획하는 사람에 관한 신문기사를 발견했다. 흥미로운 캐릭터라는 생각에 소설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등장시켰다. 그런데 처음 의도대로 작품을 완성하고 나니 “별로였다”. 고치다 지쳐 응모하지 않으려던 것이, 느닷없이 찾아온 편도선염이 개작의 계기가 됐다.

그는 ‘고양이’ 대신 ‘고양이 사냥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새롭게 쓴 소설에서 카드 빚을 진 아내가 가출한 뒤, 화자는 고양이를 거세하기 위해 덫을 놓아 병원에 넘기는 사람이 됐다.

가출한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화자를 두고 이씨는 “어디로든 갈 곳을 모르고 서성이는 현대인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사회의 제도와 인습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야성이 거세되고 길들여진 모습”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소설가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보르헤스와 마르케스 등 중남미 작가의 작품에서와 같은 ‘환상적 리얼리즘’을 구사하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환상문학은 중남미 역사와 사회문제를 독특한 테크닉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도 중남미 못지않게 굴곡이 많다.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1975년 서울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졸업ㆍ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재학중

/김지영기자 kimjy@hk.co.kr

소설/이우현 당선소감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에 지인들과 소박한 파티를 벌였다. 신춘고시를 준비해온 자에게 그 즈음의 핫이슈는 단연 당선 소식이다. “왔냐, 안 왔냐.” 그날의 경우 몇 해를 거듭해 쓴 맛을 보았던 내가 알량한 경험에서 얻은 계산에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24일이네요. 24일 하고도 오후 여덟시가 넘었어요. 올해도 떨어졌나봐”라는 말을 하는데 갑자기 불덩이 같이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부터 불쑥 차 올랐다. 문득 겁이 나기도 했다. 또 아프면 어쩌나.

거울을 보니 목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편도선이 부었다기보다는 축 늘어져 가린 탓이다. 난생 처음 체온이 38도를 훌쩍 넘어버린 사건은 응모를 마감하는 주에 벌어졌다.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며 나는 울음도 하지 못했다. 왜 하필 지금인지, 속이 상했다.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당초 투고하려던 작품을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아픈 김에 쓴 것인지 쓰다 보니 또 아팠는지 모르게 아프면서, 아파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초저녁과 밤, 밤과 새벽의 간극은 짧았다. 열은 내리지 않았고 목구멍이 바짝 말라 비틀어지는 생소한 경험 속에서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는 기다렸고 크리스마스 이브가 지나갔고, 크리스마스도 지나갔다. 나는 다시 일어서 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무릎이 부스러지더라도 나는 갈 생각이었다. 또 가리라, 밤이 전해주는 무시무시한 고통은 여전하지만 나는 한 뼘 아침 여명을 기다리는 일에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조금 헤매도, 조금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그리고는 뜻밖이어서 외려 덤덤한 당선소식을 접했다. 늦둥이 아들에게 묵묵히 기다리는 최고의 지혜를 몸소 보여주신 부모님, 내 아픈 목구멍보다 다섯 배는 더 아팠을 내 사람 아름, 자신의 일처럼 소박하고 솔직하게 기뻐해준 기호형, 종은형, 영숙 선배, 늦깎이 문청에게 소설의 맛을 알려주신 추계의 은사님들, 졸업 후의 공황상태를 잘 이끌어주신 경희의 은사님들,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축복을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싶다.

좋은 글쓰기로 모든 분들에게 화답하는 일만 남았다. 하마터면 열쇠를 잃어 오래도록 헤맬 자에게 문을 열어주신 세 분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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