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년 새해에 한국경제가 풀어나가야 할 가장 시급하고, 제일 어려운 현안이 있다면 아마 '고용 창출'을 꼽아야 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중 절반 이상이 실업자로 방황하고, 직장인들도 상시적 구조조정으로 언제 '삼팔선''오륙도' 신세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일자리만큼 우선순위에서 앞서는 문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우인천자동차(대우차 부평공장) 복직자들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들이다. 2001년 2월 대우차 정리해고에 따라 졸지에 찬 거리로 내몰려 산전수전을 겪다가 지난해 예상치 못하게 제자리에 돌아온 복직자는 모두 716명. 이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67만명에 달하는 정리 해고자들 가운데 상징적 존재이며, 동시에 바늘구멍만한 가능성을 뚫고 복직에 성공한 행운아이기도 하다. 일자리의 소중함을 몸으로 체험한 이들의 희망찬 새해 설계를 들어본다.천근호(47)
-1985년 5월 대우자동차 입사 후 도장부 근무
-2001년 2월 정리해고
-이후 1년 9개월간 주중엔 노동조합에 나가 복직투쟁, 주말엔 건설현장 일용직 생활.
-2002년 12월 대우차 1차 복직 300명에 포함돼 현재 조립2부 근무
-맞벌이 하는 아내와 대학 휴학 후 방위산업체에 근무중인 아들과 살며, 노모와 교통사고로 12년째 누워있는 동생을 부양하고 있음.
권순열(42)
-1987년 1월 대우자동차 입사 후 조립1부 근무
-2001년 2월 정리해고
-이후 2년 5개월간 누님 음식점 보조, 인력파견업체 취업 임시직, 남동공단 중소기업 생산직 등으로 근무
-2003년 7월 2차 복직 416명에 포함돼 현재 조립1부 근무
-아내와 딸(초등 6년) 아들(초등 3년)과 함께 살고 있음.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큰딸이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직업을 당당히 쓸 수 있어 행복.
최명용(37)
-1991년 9월 대우자동차 입사 후 조립1부 근무
-2001년 2월 정리해고
-이후 1년간 복직투쟁을 하다 지난해 퇴직금으로 친구와 인테리어 사업을 벌였으나 빚만 지고 2003년 5월 폐업
-2003년 2차 복직 416명에 포함돼 현재 엔진구동보존부에 근무
-미혼. 혼자 살고있는 자신이 부모님의 유일한 걱정거리다.
해고기간은 차라리 악몽
"대우차가 정리해고를 실시한 지 얼마 후 한 TV프로에서 이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해고자 1,725명의 명단이 쭉 자막으로 흘러나오는데, 같이 보던 아들 녀석이 '아빠 이름이 TV에 나오네'라고 소리치더군요. 그 순간 해고자가 됐다는 걸 처음 절감했습니다. 배경음악은 또 어찌나 비장하던지…" 권순열씨는 농담처럼 가볍게 말을 시작했으나, 말을 마칠 때는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표정이 흐려진다. 최명용씨의 해고생활은 2001년 2월19일자 한국일보 1면에 실렸던 사진에서부터 시작된다. "삭발 한 채 닫힌 문을 붙들고 절규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며 웃는다. 천근호씨는 "해고 시절에는 잠자는 순간만이 유일하게 평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다시 똑같은 악몽이 시작됐죠"라며 무엇보다 대기업 직원에서 실업자가 되고 보니 하루 아침에 싸늘하게 변하는 주변의 인심이 가장 가슴 아팠다고 회고한다.
구직을 위해 중소기업을 찾아가면 대부분 "대우차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일을 하겠냐"며 거절하는데 그 어투에 조소가 묻어 날 때면 좌절감이 엄습했다고 3명 모두 입을 모은다. "대우차 있을 때 데모 많이 했죠?"라고 묻는 삐딱한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서 몸이 부서져라 일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권씨는 2년여 해고기간동안 체중이 10㎏이상 줄었다. 최씨의 경우는 결국 구직을 포기하고 퇴직금을 털어 건축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친구와 동업을 시작했다. "경험이 없으니 결과는 시작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결혼 밑천으로 장만한 아파트를 연립주택으로 옮기고 나서야 겨우 그 뒷수습을 할 수 있었죠."
복직안된 1,000명 위해 열심히 일해
"해고 전에는 회사 밖에서 절대로 입지 않았던 회사 점퍼를 항상 입고 출퇴근 합니다. 또 편한 출퇴근버스를 안타고 붐비는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대기업의 보호막에 안주하며 살다가 졸지에 겪었던 뼈아픈 기억들을 잊지않고 늘 긴장하기 위해서죠." 권씨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출근할 때마다 이전에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생생한 삶의 의욕을 느낀다고 말한다.
복직 후 생소한 부서에 배치된 최씨는 "엔진관련 전문용어들을 외우느라 힘듭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해 적응기간을 단축해야죠"라며 "복직하고 보니 근무환경이 해고전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바뀌었고 설비투자도 활발한 것 같아 일할 맛이 난다"며 의욕을 보였다. 천씨 역시 "적지 않은 나이에 생소한 분야에 배치됐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남보다 적극적으로 작업에 임하려고 노력한다"며 항상 '마음이 변하면, 행동이 변한다'는 격언을 새기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된 것은 단순히 복직돼 기쁘기 때문만이 아니다. 아직 복직 못한 1,000여명의 해고자의 복직 시기가 자신들의 노력에 따라 당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우차 노사는 올해 3·4분기에 200명을 추가 복직하며, 나머지 해고자는 부평2공장이 2교대에 돌입하는 시점에서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지난 7월의 2차 복직도 부평 1공장 2교대를 계기로 이뤄진 것이다.
새해 꿈은 부평공장 GM인수
힘든 시련에 단련된 탓인지 3명의 복직자들의 새해 소망과 결심은 소박하고 진지하다.
권씨는 "올해 중학교에 진학하는 맏딸이 생활환경조사서에 아버지의 직업을 당당하게 적을 수 있게 된 것만 생각해도 올해는 생애 최고의 1년이 될 것 같은 예감"이라면서도 "GM대우가 부평공장을 하루빨리 인수해 보다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제2의 구조조정이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떠나질 않는다"라고 불안감을 토로한다.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는 최씨는 "올해는 술을 줄여 건강도 지키고, 줄어든 술값을 모아 사업실패 후 남아있는 약간의 대출금도 완전히 정리해야겠다"며 "새로 익히기 시작한 엔진관련 부품명이 대부분 영어로 돼 있어 이제 영어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천씨의 새해 결심은 철학적이다. "쳐다보지 않고, 내려다 보며 살며 삶의 여유를 찾을 생각입니다. 건강하다는 것만한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새해에는 가족과 주말마다 가까운 곳에 등산을 다닐 생각입니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 대우車 남은 과제는
지난해 10월 GM대우자동차는 출범 1돌을 맞았다며 대대적인 홍보를 펼쳤지만, 1999년 8월 구 대우그룹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과 함께 시작된 대우차 처리 작업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GM이 옛 대우차 중 일부분만 인수했기 때문이다.
GM은 당시 비교적 신형 생산설비를 갖춘 군산 승용차공장과 창원공장, 베트남공장과 일부 해외 판매법인만은 인수했다. 이에 따라 옛 대우차는 GM대우, 대우인천차(부평공장), 부산 대우버스, 군산 대우상용차, 11개 해외공장과 판매법인이 모인 대우자동차 등 5개 독자법인으로 분리됐다.
이중 부산 대우버스는 2002년 영안모자가 인수했고, 군산 대우상용차는 지난해 11월 인도의 타타그룹이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대우인천차와 대우자동차는 여전히 주인이 없는 상태다.
특히 옛 대우차에서 생산직 인원 70%와 생산량의 50%를 차지하던 부평공장은 GM이 최소 6년간 위탁생산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인수 대상에서 제외했다. 당시 GM은 부평공장의 추가 인수 전제조건으로 6개월 연속 2교대 가동 노사 분규로 인한 연간 손실시간이 전세계 GM 공장의 2001년 평균보다 이하일 것 매년 노동생산성 4% 향상 품질이 GM 세계 평균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 등을 제시했다. 또 GM과 대우차 채권단은 이 조건이 달성되면 3개월 이내에 신설법인과 부평공장을 인수, 통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대우차 인천공장의 경우 사무·관리직은 GM대우, 생산직은 대우인천차로 소속이 나뉜 채 '한 지붕 두 가족' 형태의 부자연스러운 동거를 계속하고 있다. 여기에 2001년 2월 정리해고 된 1,725명 중 현재 716명만 복직된 상태이다. 대우차 노사는 지난해 6월 정리해고자 중 복직 희망자 전원을 단계적으로 재입사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내년 3·4분기에 200명을 추가로 복직하며, 나머지 인원은 부평2공장 2교대 가동시 복직이 결정된다.
결국 부평공장이 GM에 추가 인수되고, 아직 복직하지 못한 1,000명 남짓의 해고자가 일터로 돌아와야만 3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대우차 처리가 비로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해외공장 처리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정영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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