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에게 따뜻한 맥주와 차가운 샌드위치는 괜찮지만 그 반대(차가운 맥주와 따뜻한 샌드위치)는 위험하다." 북유럽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의 신임 공무원들에게 주입되는 윤리 강령이다.국제투명성기구가 선정한 '부패 없이 깨끗한 나라' 3년 연속 1위(2001∼200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뽑은 '뇌물이 가장 통하지 않는 나라'1위(2002년) 세계경제포럼의 국가경쟁력 지수 1위(2002년) 등 화려한 이력이 따라다니는 핀란드의 저력이 응축된 말이기도 하다.
2003년 공직자 비리사건 단 1건
핀란드 수도 헬싱키 법원이 올해 처리한 공직자 관련 비리 사건은 단 1건. 사건 내용은 공무원들이 노르웨이의 한 업체에 쇄빙선을 싼값에 빌려 준 대가로 신용카드를 받고 외국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간 수뢰 등의 혐의로 처벌 받은 공직자 수는 모두 합쳐봐야 50명을 넘지 않는다. 그것도 1996년 8명, 97년 10명, 98년 3명 99년 2명 등으로 꾸준히 줄고 있어 '부패범죄율 0%' 의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카를레 레무스 내무부 경찰국장은 "핀란드인들은 부패나 비리, 뇌물 같은 말은 사전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핀란드에서는 공무원에게 식사대접을 하는 것 자체가 큰 부정이다.
이러한 '유리알 공직사회'가 가능한 이유는 공직자의 명예를 최우선하는 사회적 풍토 장관을 제외한 모든 정부 부처의 공무원들에게 종신직을 보장하고, 대기업 수준의 보수를 지급하는 신분보장 제도 액수와 상관 없이 뇌물을 받은 공직자는 즉각 해임돼 최소 5년의 징역형을 받게 하는 엄격한 처벌규정 등이 꼽힌다. 사법기관은 물론 각 부처와 지방정부, 의회에까지 자체의 반(反) 부패기구와 옴부즈만 제도를 도입해 빈틈 없는 24시간 감시체제를 구축한 것도 성공 요인이다.
도시락 싸들고 다니는 국회의원
핀란드의 깨끗한 정치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 두 가지. 지난해 핀란드 국회는 의원들의 뇌물수수를 처벌하는 법률 제정 문제로 한참 동안 시끄러웠다. "그런 범죄가 있지도 않은데 굳이 관련법을 만드느라 국민의 세금을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사회 각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핀란드의 대표적 여성정치인 아넬리 예텐마이키는 경쟁후보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몰래 지지했다는 내용의 비밀문서를 폭로해 지난해 총리에 당선됐다. 하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그 문서를 입수했다는 비난이 쏟아지면서 취임 63일 만에 사퇴했다.
이런 분위기니 선거자금 스캔들 같은 것은 신문의 국제면에나 나오는 얘기다. 헬싱키의 국회의사당 앞뜰에선 보좌관 없이 무거운 서류가방을 깔고 앉아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국회의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정치인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판공비 내역, 소득세와 재산세 내역은 매년 낱낱이 공개된다. 신문들은 이날 정치인들의 재산과 납세에 대한 기사에 거의 전면을 할애한다.
정부는 1967년 제정한 선거자금법에 따라 정당에 매년 1,600만 유로(227억여 원)를 지급하고, 이외의 돈은 단 1유로도 선거비용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세무당국은 특별한 절차 없이 언제든 모든 국민의 계좌를 추적할 수 있고, 가·차명 계좌의 개설 자체가 불가능하다. 정치인들이 굳이 돈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고, 부려서도 안 되는 체제인 것이다.
코쿠무스 당의 파울라 코코넨 의원은 "정치인들이 지금 무엇을 사거나 먹고 있는지까지도 환히 들여다보이는 상황이지만 아무도 불안해 하지 않는다. 떳떳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신뢰가 돈이다"
핀란드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1.5배가 약간 넘는 33만 8,145㎢. 천연자원은 거의 없고 삼림과 호수가 국토의 85%를 차지한다. 그나마 1년 중 6개월은 온 나라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어 한국처럼 사람이 거의 유일한 자원인 나라다. 오랜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한국과 비슷하다. 하지만 인구가 519만 명인 핀란드의 2002년 1인 당 국민소득(GNP)은 2만4,145달러로 한국(1만13달러)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 중 중요한 한가지를 핀란드의 투명한 기업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영국 BBC 방송에 소개된 헬싱키대학 경영학과 전공 수업의 한 장면. 교수가 신입생들에게 "성공하고 싶으면 정직해져라. 투명하지 못하면 투자자들이 외면한다. 신뢰가 곧 돈이다"라는 세 마디를 반복해 외우게 한다.
티모 부오리 핀란드 국제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은 "이런 교육을 받고 배출된 기업인들 사이에 뇌물이 통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보안업체인 'F 시큐리티'의 미코 히포넨 사장은 "제품 자체의 성능보다 회사가 얼마나 투명하게 운영되는지를 강조하는 광고의 효과가 훨씬 높을 정도로 소비자들의 의식수준도 높다"고 말했다.
기업인들이 돈을 내세워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적인 이동통신기기업체인 노키아의 한 간부는 최근 고속도로 속도위반 범칙금으로 8만4,000여 유로(1억2,000만원)를 냈다. 도로교통법상 고소득자는 전년도 수입의 14분의 1을 벌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비자들은 물론 노조와 회사 사이에도 절대적인 신뢰 관계가 맺어졌다. 1980년대 매년 평균 2,000여건에 달하던 파업 건수는 2000년 이후 50건 이하로 뚝 떨어졌다. 라일라 무스타노자 국제투명성기구 핀란드 지부장은 "핀란드 기업들은 투명하다는 이미지만으로도 전세계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놀라운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말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미스터 클린 아시아 싱가포르 뇌물? 꿈만 꿔도 "아웃"
인구 400만 명에 면적은 서울(605㎢)과 비슷한 660㎢ 크기의 섬나라 싱가포르. 이 작은 나라는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순위, 청렴도 순위 등에서 매년 아시아 국가 중 1위는 물론 서방 선진국들을 제치고 상위권을 차지해 '미스터 클린 아시아'라는 명성을 얻었다.
오늘의 싱가포르를 만든 일등공신은 집권 25년 내내 단호한 반부패 정책을 편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다. 그는 자서전 '일류국가의 길'에서 "우리에게 부패방지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였다. 반부패 정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굴복시켰다"고 회고했다.
싱가포르 반부패 투쟁의 총사령부는 탐오조사국(貪汚調査局). 총리 직속 사정기관으로, 비리가 의심되기만 해도 누구든지 영장 없이 체포하고 모든 개인과 기업의 은행계좌를 자유롭게 추적할 수 있는 등의 막강한 권한이 있다. 하지만 '권력의 시녀'라는 비난을 받기는커녕 국민들에게 신앙에 가까운 신뢰를 받는다.
1960년대 제정된 서슬 퍼런 부패방지법은 공직자 비리가 설 자리를 아예 없애 버렸다. 이 법에 따르면 뇌물을 받거나 받을 의도가 있었던 공무원은 사회에서 완전 격리되고 공직자는 형성과정을 입증하지 못하는 전재산을 압수당하며 민간기업 주식을 갖거나 채무를 지지 못하게 돼있다. 시민들의 감시를 독려하기 위해 내부고발자를 철저하게 보호한다는 조항도 있다.
로렌스 림 탐오조사국 공보관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 지도자들의 단호한 의지가 필요하다"며 "한국처럼 큰 물고기는 놓아 주고 작은 물고기만 처벌하는 방식은 성공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
/최문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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