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을 더 이상 정치권에 맡길 수 없다." 17대 총선이 치러지는 새해 벽두 시민사회의 분위기는 차갑고도 무겁다. "바꿔, 바꿔, 바꿔"라는 로고송과 아래로 치켜 내린 엄지손가락이 전국을 휘몰아치던 2000년 16대 총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4년 전에는 선거판에서 처음으로 시민의 힘을 행사한데 따른 열기가 넘쳐흘렀다. 올해 시민사회의 기류는 뜨겁다기보다 냉엄하다. 정치권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촘촘한 그물 망으로 한 치의 부패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엿보인다.
지난해 국회의 정치관계법 개정을 둘러싼 행태를 바라본 시민사회의 표정은 한마디로 냉소다. 불법 대선자금이 드러난 만큼 정치권이 자기정화를 이룰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았는데도 역시 '당리'와 '기득권'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연말에 전례 없이 한 목소리를 냈다. 무려 392개 단체가 연일 비상시국회의를 개최하고 국회 정치개혁특위의 관련법 처리에 제동을 걸 정도였다. 단체들은 이를 위해 선거구제 등에 대한 크고 작은 내부의 이견을 모두 묻었다. 고계현 정치개혁국민행동 정책실장은 "국회 자문기구인 범정치개혁협의회의 개혁안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었다"면서 "그런데도 여든 야든 모두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치고 받기만 했다"고 말했다.
정치개혁의 핵심인 정치자금 투명화나 돈 선거 근절 논의가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이 시민사회 내의 공감대다. 이 같은 정치권의 '개혁시늉'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심판은 다양한 갈래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시민사회 내에는 총선을 앞두고 중립적 감시, 적극적 지지·당선, 직접 정치참여, 보수 세력화 등 4개의 큰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중립적 감시운동은 스펙트럼이 가장 넓다. 참여연대 중심의 정치개혁연대는 지역별·이슈별 낙천·낙선 운동 등을 검토하고 있다. 김민영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은 "총선연대처럼 단일 기준으로 전국적인 낙천·낙선운동을 펼치는 것은 이제 곤란하다"면서 "지역 단체와 환경 등 전문단체는 제한적 낙천·낙선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실련 중심의 정치개혁국민행동은 후보자 정보 공개 운동에 집중할 계획이며, 중도 성향의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는 공명선거 캠페인 등 정책 대결을 유도할 방침이다.
적극적 지지·당선 운동은 논란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시민사회 내 직접 출마 세력이 만든 '총선 국민주권연대', 노사모 주축의 '국민의 힘' 등이 당선운동을 계획하고 있고, 자유시민연대 등 보수진영도 침묵을 깰 조짐이다.
올해 시민사회의 부패감시활동은 다양해진 만큼 폭이 넓어진다. 하지만 자칫 자중지란으로 추동력을 잃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정치 개혁이라는 공통 목표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분화 현상이 뚜렷해졌다"면서 "연합 전선을 구축할 여지가 있을지, 있다면 공통의 실천 전략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의원에 여행경비 요구… 수천만원대 票장사… "풀뿌리 부패"도 위험수위
정치인에게 손을 벌리는 유권자들의 '풀뿌리 부패'는 정치 부패와 돈 선거의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선거 때면 "표를 모아주겠다"고 접근하는 '정치꾼'과 각종 지역·친목 행사를 이유로 돈을 요구하는 유권자가 부지기수다. 의원들은 "말로는 '깨끗한 정치'를 외치면서 자신에게 서운하게 하면 돌아서서 욕하는 게 현실"이라고 고충을 토로한다.
우표값이 100만원 서울의 중진 A의원은 지난 총선 때 장애인 및 퇴역군인 단체로부터 황당한 요구를 받았다. "의정활동을 회원들에게 홍보해 줄 테니 우표값을 달라"는 제의여서 "고맙다"고 했더니 "회원이 1,000명인데 1인당 발송비 1,000원씩, 총 100만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터무니 없었지만 뒤늦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막무가내 손벌리기 경기도의 B의원은 최근 노인정을 방문했다가 노인들이 "텔레비전과 냉장고 세탁기가 없으니 당장 놓아달라"고 생떼를 쓰는 통에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B의원이 "선거법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해도 "없는 사람 돕는데 법은 무슨 법이냐"며 노인들은 막무가내였다.
C의원은 동네 부녀회원들에게 수백만원의 해외여행비를 '뜯겼다'. 선거 때 자원봉사를 했던 주부들이 해외여행을 함께 가자고 해 당 간부를 대신 보냈더니 현지에서 "여행비 전액을 부담하라"고 요구,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냈다.
지역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지방의 중진 D의원은 여행비나 체육비, 경·조사비 등 지역구 관리에 쏟는 비용이 매달 2,000만원을 넘는다. 때만 되면 각종 부녀회·산악회·지역단체 등에서 걸려오는 전화로 몸살이 날 지경이다. "단풍 구경, 야유회 간다"는 핑계지만 돈 달라는 소리다. 관광버스에 올라 큰 절하고 음료수 박스에 '인사값'으로 20만원 정도 쥐어줘야 뒤탈이 없다.
동네 체육대회나 친목·관변 단체의 정기모임 때도 어김없이 연락이 온다. 깜빡 빠뜨리면 당장 "저 X은 지역구엔 관심도 없다"는 소문이 돈다. 끝도 없는 경·조사비엔 허리가 휠 지경이다. 한번에 최소 5만∼10만원, 핵심 당원이면 30만원은 돼야 한다. 법 규정대로 1만5,000원만 넣었다간 "의원이 좀스럽다"고 실컷 욕만 먹는다.
수 천만원대 표 장사 원외위원장 E씨는 지난 총선 때 상대 진영의 모 간부로부터 "조직원 60여명을 데리고 갈 테니 1인당 20만원씩 활동비를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 간부는 이후에도 품위유지비 명목으로 200만원씩 요구, 결국 선거가 끝날 때까지 수천만원을 뜯어갔다. 선관위 관계자는 "돈이나 향응을 받은 유권자에 대해 기부액수의 50배의 과태료를 부과토록 법을 개정하고 유권자 개혁운동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은 "경·조사비나 교통비·식사 제공을 전면 금지해 돈 드는 정치구조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막상 '피해자'격인 정치권은 "그러면 선거를 치를 수 없다"며 손사레를 친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정치관계법 10년간 개악 시도
"국회가 돈 안 드는 선거를 시도할 수 있는 기본 틀을 만들었다."
1994년 3월 국회가 통합선거법 정치자금법 지방자치법 등 3대 정치개혁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자 언론들은 사설을 통해 이렇게 입을 모았다. 요즘 다시 드러난 대선자금 비리는 이 같은 평가를 무색케 한다.
94년 정치개혁입법이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분명하다. 선거사범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고 선거공영제를 도입해 돈을 덜 쓰도록 했다. 그러나 그 후 10년 간 정치권은 간단 없이 담합해 정치관계법을 개악하려는 시도를 거듭해왔다. 2000년엔 여야가 담합해 선거사범 공소시효를 4개월로 단축했다가 6개월로 환원했고, 선거보조금을 50%인상했다가 철회하는 등 여론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100만원 이상 정치자금 수표 사용 의무화나, 정치자금계좌단일화 등 정치자금 투명화 방안은 끝내 거부했다. 여야는 지역구을 5석 늘이고 전국구를 5석 줄이기로 합의했다가 집중포화를 맞기도 했다. 그런 뒤에야 의원정수를 299명에서 273명으로 줄여 IMF체제 하의 고통을 분담했다. 2003년 12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일어난 일들이 전혀 새로운 현상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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