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영업부장인 최진철(48)씨는 요즘 한달이면 한두번 하룻밤 밀월여행에 나선다. 올해 고3에 올라가는 둘째 아들이 학원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것을 확인한 뒤 문단속을 하고 차에 오르면 새벽 2시. 송추나 양평 등 서울 근교 분위기있는 휴양지로 향하는 차안, 그의 옆자리에는 최씨가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친구'라고 말하는 아내가 앉아있다. 두 사람은 근사한 카페에서 차 한잔을 두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가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모텔로 옮겨 사랑을 나누고 새벽 5시 무렵이면 다시 서울로 향한다. 공부하는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고, 거꾸로 방해도 받지않기 위해 시작한 새벽 밀월여행. 불과 3년전만 해도 '무늬만 남편'이었던 최씨를 바꿔놓은 계기는 40대 중반을 넘기며 불현듯 고개를 든 노후생활에 대한 관심이었다."전엔 친구들끼리 만나면 직장얘기가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주로 노후준비에 대한 대화를 해요. 그중에서도 새삼스럽게 아내의 중요성을 말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나이가 드니 소외감도 느끼고, 집안에서 이방인 노릇을 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아이들은 크면 다 떠나고…. 그래도 내 곁에서 같이 늙어가며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내구나 생각하니까 부부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더군요."
행복한 노후를 위한 첫번째 조건으로 원만한 부부관계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직장에서의 성공이나 자식농사, 부모공양 등 우선순위에 밀려 등한시되기 일쑤였던 부부관계가 사실은 행복한 노후를 위한 가장 확실한 '보험'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직장에서의 퇴출 연령은 낮아지고 반대로 평균수명은 늘어나는 시대, 60대 이후 거의 20년을 지속해야하는 노년의 삶을 함께 꾸려갈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배우자라는 인식은 가부장적 권위속에 안주했던 40,50대 중년남성들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홍보 및 PR에이전시 루트엠의 김영민(40) 대표는 지난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독립하면서 아내의 고마움을 새삼 깨달았다. 가족에게 경제적인 짐을 지우게 될까봐 고민하던 그에게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아내는 "나도 버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적극적인 지원을 보냈다.
"만일 집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누구와 이런 문제를 상의하고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격려를 받았을까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고마워져요. 심리적인 안정감과 자신감을 얻게됐거든요."
결혼초부터 저녁 설거지는 도맡아 할 정도로 가정적인 남편이지만 김 대표는 식성이 좋지않은 아내를 위해 요즘은 주말마다 인터넷을 뒤지거나 회사 여직원들에게 배워서 특별요리를 만들어준다. 지난주에는 샐러드와 야채수프, 각종 과일과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차린 스테이크 만찬을 준비해 아내를 기쁘게 했다. 가족과 함께 등산을 가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 주말프로그램이다.
"올해 여덟살된 외동아들과 계획중(!)인 딸아이 시집장가 잘 보내고 둘이 오붓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게 꿈이예요. 그러려면 지금부터 아내 건강도 함께 챙겨야지요."
아내 건강 챙기기와 공통취미 갖기는 노후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다. 골프경력 15년째라는 (주)대교의 김영관(52) 전무는 3년전에 아내에게 골프채를 사다주며 같이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결혼초기엔 '자유남자'였어요. 직장과 친구밖에 몰랐지요. 40대 초반쯤 되니까 정신이 들더군요. 아내가 몇차례 이혼생각까지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어요. 나 늙어서 힘 빠지고 연줄 끊기면 누가 내 곁에 있을까 생각해보니 아내밖에 없대요. 친구들 중에는 이혼남도 있고 사별한 사람도 있는데 얼마나 초라한지 몰라요. 홀아비 비참함은 말로 못하거든요. 해로하는 것의 중요함을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혈압이 높은 아내를 위해 운동을 같이 하고 자연히 대화도 많아져서 가정이 더 화목해지는 것 같아요."
한국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남성들의 최근 의식변화는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핵가족시대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말한다. "부부만큼 지속적이면서 모든 것을 서로에게 다 노출시키는 관계는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식농사도 결국은 부부농사가 잘 지어져야 가능하고 효도도 부부관계가 원만해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시대입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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