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수명 80세(2020년 전망), 체감정년 사오정(45세 정년)의 시대에 인생과제로 던져진 생존방정식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40년 가까운 기나긴 인생여백을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위해, 누구와 함께 살아야할 지에 대한 실존적이고도 현실적인 질문 앞에 한국의 중년세대가 섰다. 인생 후반전의 '휘슬'이 울린 셈이다. 지금의 중년이 태어나고 교육받던 1960∼70년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50∼60세 수준이었다. 때문에 인생시나리오도 단막극에 맞춰져 있었다. 한번 선택한 직장과 직업에서의 승부가 인생의 전부였다. 꺾어지는 '마흔고개'가 그래서 더더욱 아팠다. 의학 발전과 식생활 개선으로 평균 수명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요즘, 인생 제2막이 두려움과 기대, 호기심과 초조함의 두 얼굴로 한국의 중·장년을 찾아왔다. 1막에서 좌절한 인생이라도 2막에서 지혜와 경륜을 밑거름 삼아 얼마든지 새로운 차원의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냈더라도 2막 인생을 준비하고 계획하지 않는다면 불쌍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자신의 향기를 남길 수 있는 2막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승부처다.
"내일 모레면 40. 눈만 뜨면 일에 매달렸지만 여전히 월급쟁이 일상. 이룬 것도 없는데 나는 벌써 내리막길에 서 있다." 10년 전 황인수 삼성SDS부장(49)은 이런 생각에 짓눌려 밤잠을 설쳤다. 어금니가 아릴 정도의 중년통(痛)을 앓아야 했던 그에게 아침신문을 통해 '제2의 인생'에 대한 희망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제3세계 기아문제를 접한 황 부장은 곧바로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의 후원자로 등록했다.
그가 돌보는 전세계 기아아동은 현재 9명. 황 부장은 이들에게 후원금과 이메일을 통해 일용할 양식과 삶의 용기를 전해주고 있다. 가족과 함께 매주 사회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황 부장은 "나를 진정 필요로 하는 곳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를 일깨운 것은 성공을 위해 내달린 인생항로의 좌표를 '가치'로 바꾸고 살겠다는 자각이었다.
1999년 한미은행 런던지점 근무시절 박선오 홍보실장(46)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몸무게 102㎏. 식탐과 나태의 결과였다. "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 박 실장은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1년 만에 80㎏까지 감량한 박 실장은 8번이나 마라톤 완주를 성취할 만큼 마니아로 변했다. 마라톤은 건강에 대한 자신감만 되찾아준 것이 아니다. 스노보드도 수준급 실력인 그는 퇴직 후 마라톤과 스노보드 전문숍을 내는 것이 꿈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신나게 살겠다"는 그는 갈수록 첨단화하는 관련장비 공부는 물론 수지침까지 배울 예정이다.
4년 전 굴지의 운송회사 부사장을 끝으로 35년간 직장생활을 접은 이광희씨(61)의 명함에는 이제 '골프 인스트럭터'라는 직함이 적혀 있다. 지난해 사상 최고령으로 미국프로골프지도자협회(PGTCA)의 티칭프로 자격을 따낸 뒤 경기 분당의 한 골프연습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인터넷사이트에서 '골프 전도사'로 통한다. "이전에는 가족을 위해 생활인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이씨는 "건전한 골프문화 확산과 꿈나무를 키운다는 생각에 더 큰 보람과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영풍신용금고 CEO를 3번이나 연임하는 등 잘 나가던 금융맨에서 택시기사로의 전업을 선언,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던 김기선(60)씨. 2년이 지난 요즘, 그는 "정말 일하는 맛이 난다"며 활기찬 모습으로 핸들을 잡고 있다.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는 김씨는 "택시기사 만큼 평생 일자리가 보장되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직업도 없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인생롱런의 좌우명은 "직장은 잃어도 일손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
이전에는 은퇴 이후의 삶까지 고민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단판 승부를 위해 앞만 보고 내달렸다. 또 때가 차서 한 직장에서 물러나면 기껏해야 10년 안팎의 세월 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조기퇴직 추세는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다. 산업구조와 고용형태의 변화로 인력관리가 저장과 삭제의 '엔터키'를 누르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 돼 버린 마당에 평생 직장의 울타리는 유물이 됐다.
설령 0.4% 만이 살아 남는다는 정년 퇴직의 바늘구멍을 뚫고 나와도 20∼30년의 남은 인생은 소일거리로 보내기에는 너무 긴 공간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특급열차를 타고 있다. 지금의 중년은 10∼20년 후 노인 인구로 편입되면서 유례없는 저출산 풍조와 맞물려 초고령화 태풍의 중심권으로 빨려 들어가게 돼 있다. 벌써부터 그 영향력이 감지된다. 이전 같으면 손주 재롱을 즐겼을 지금의 황혼 세대들은 젊은 세대 못지않게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운다. 출세를 좇고, 혈기 만을 믿고 가정과 건강을 돌보지 않은 후유증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몰고 올 초고령화 시대. 퇴직금제도의 개선과 노인일자리 창출 등 국가와 사회가 떠맡아야 할 과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감독도 주인공도 '나' 자신이라는 자각과 의지가 우선이다. 경제적 토대 마련 못지않게 정신적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아무런 준비없이 2막의 커튼을 걷어올린다면 '고려장'을 자초하는 셈이다. 조조익선(早早益善:The earlier, the better). 늦을수록 손해다. 지금 롱런을 위한 인생의 마스터 플랜부터 다시 짜서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전업주부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이두희(52)씨의 롱런 준비는 9년 전 영어학원에서 시작됐다. 인생의 황혼을 가장 아름다운 황금기로 건강하게 보내자는 남편의 권유 때문이었다. 부부는 세계 배낭여행을 통해 책 한권을 '유산'으로 남겨놓을 계획이다. 수준급으로 성장한 영어실력 덕분에 이씨는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자원봉사 일에도 열심이다.
롱런은 함께 뛰어줄 후원자(멘토)가 필요하다. 대림산업 유제규 과장(40)은 며칠 전 띠동갑 모임인 '용용회'의 망년회 자리를 통해 '80―80 클럽'을 만들었다.
앞의 80은 이 클럽 회원들이 바라는 기대 수명. 여기에는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게 될 40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뒤의 80은 80세에 이뤄야 할 목표. 골프 타수 80을 뜻한다. 건강, 경제력, 친구 등 3가지 조건이 함께 어우러져야 가능한 이른바 '에이지슈터(나이와 타수가 같은 것)'를 위해 같이 노력하자는 롱런의 다짐이었다. 이들은 새해 첫 모임의 필수 지참물을 자신들의 종합건강검진표로 정했다.
넉넉하고 활기차고 뿌듯한 낭만 노년의 꿈, 준비된 자만의 몫이다.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결정을 하는 시점이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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