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2003년은 참으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나라밖에선 사스와 이라크 전쟁의 충격이 밀어닥쳤고, 대내적으론 극심한 내수 부진 속에 카드사 부실과 신용불량자 양산, 부동산값 폭등, 노사갈등, 그리고 기업 비자금수사까지 1년 내내 경제는 옥죄임을 당했다. 2004년 경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정보기술(IT) 산업이 이끄는 수출호조가 그나마 한 가닥 밝은 빛을 던져주고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악재들이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어 섣불리 낙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관건은 기업들이다. 기업들의 경기인식과 투자·고용방향에 따라 우리 경제는 장밋빛이 될 수도, 우울한 잿빛이 될 수도 있다. 올해로 창간 50주년을 맞은 한국일보는 50개 국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 설문조사를 통해 금년도 경제전망과 바람직한 정책방향을 점검했다./편집자주
경기회복은 언제쯤?
금년 실물경기가 지난해보다 나아질 것이란 관측에는 거의 모든 CEO들이 동의했다. 경기회복 시점을 묻는 질문에 3·4분기란 응답이 40%(20명)로 가장 많았고, 2분기도 36%로 엇비슷했다. 하지만 4·4분기 이후 또는 '별로 기대할게 없다'는 응답도 18%나 됐다.
침체탈출을 위한 선결조건(복수응답)으로는 '정책을 통한 정부의 신뢰회복'(29명)이 가장 많았다. 지난 1년간 현안에 끌려 다니며 갈팡질팡해온 정부에 대해 얼마나 불신의 골이 깊은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지난해 8월말 한국일보가 참여정부 출범 6개월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CEO들의 74%가 경제정책 운용의 문제점으로 '정책혼선에 따른 정부의 신뢰상실'을 꼽았다. 만약 올해도 정부가 민간 경제계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향후 어떤 경제정책도 시장에 먹혀 들어가지 않는 심각한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두번째 경기회복 조건으론 '노사안정'(23명)이 꼽혔다. 금리인하 재정확대 감세 등 통화재정정책을 통한 경기부양(13명)과 원화절상 억제(11명)에 대한 주문도 많았다. 10명의 CEO는 '비자금수사를 빨리 끝내야 경기가 살아난다'고 답했다.
투자, 고용 늘어날까?
경기가 살아나려면 소비가 늘어야 하고, 소비가 증가하려면 투자와 고용사정이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금년도 투자는 작년보다 소폭 증가, 고용은 제자리 걸음이 예상된다. 때문에 2∼3분기중 경기가 반등하더라도 그 폭은 매우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일단 기업들의 투자의지는 확인됐다. '수익이 생기면 어디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것인가'란 물음에 절반이 넘는 58%가 '투자'라고 답했다. 물론 '부채상환'(26%)이나 '현금비축'(10%) 같은 보수적 경영패턴을 보인 CEO도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금년도 실제 투자(지출)규모에 대해선 48%가 '작년 수준 동결' 계획을 밝혔다. '약간 늘리겠다'는 CEO는 40%였고 '크게 늘리겠다'는 CEO는 2%에 불과했다. 결국 작년보다 투자확대를 계획한 기업은 절반에도 못 미치고(42%) 있는 셈이다.
경기도 나아질 것 같고 투자의사도 있는데, 막상 실제 투자에는 이처럼 소극적인 까닭은 뭘까. 응답 CEO의 50%(25명)가 '정치·사회적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는 점을 꼽았다. 정치불안 사회갈등 등 경제외적 변수들이 경기개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뜻이다. '마땅한 신규투자처가 없다'는 응답이 22%로 뒤를 이었고, '투자여력이 없다'가 18%였다. 10%의 CEO는 '국내보다는 아예 해외로 나가겠다'고 답했다.
고용상황은 투자보다 더 비관적이다. 금년 고용계획에 대해 56%가 '작년 수준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크게 늘리겠다는 기업은 하나도 없었고, '약간 더 뽑겠다'는 응답은 30%에 그쳤다. 따라서 올해도 청년실업 문제는 좀처럼 해소되기 어렵고, 취업문이 비좁은 만큼 지표경기 변동에 관계없이 체감경기는 계속 썰렁할 것 같다.
어떻게 풀어야하나
참여정부가 향후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할지 물어봤다(복수응답). '기업 투자유인책을 마련해달라'는 주문(24명)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론 '미래성장동력이 될 신산업 지원'(20명)이었다. 모두 장래의 발전을 위한 경제적 불씨를 지펴달라는 요구였다.
3위는 '노사관계에서 엄정한 법집행'을 촉구하는 응답(15명)이 차지했다.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카드 투신 등 금융구조조정'과 '고용 안정'(이상 10명)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빈부격차 해소'부터 역점을 둬야 한다는 대답은 4명에 불과했고 '복지 확대' 주장은 단 1명도 없어 기업들은 역시 분배 보다는 성장위주의 정책을 선호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치자금 낼까?
분식회계와 비자금 등 기업투명성 문제가 도마위에 올랐지만 CEO들은 소속기업의 투명성 문제에 대해선 자신감을 나타냈다. '투명하다고 자신한다'는 응답이 68%, '비교적 투명하다'는 답이 32%에 달했다.
4월 총선에서 정치권의 음성적 자금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란 물음에는 54%가 '공식 정치자금만 내겠다'고 답했다. '돈주고 뺨 맞는다'는 재계의 피해 의식을 반영하듯, 공식·비공식 관계없이 '전혀 정치자금을 낼 생각이 없다'는 CEO도 34%가 됐다. 하지만 '정치권 자금요구를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어렵지 않겠는가'(2%), '거절은 해도 약간의 성의표시는 할 수 밖에 없지 않나'(8%)는 솔직한 소수의견도 있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 설문에 참여한 CEO 명단
강동석(전 한전 사장) 구학서(신세계 사장) 김대중(두산중공업 사장) 김병균(대한투자신탁증권 사장) 김쌍수(LG전자 부회장) 김선배(현대정보기술 사장) 김순택(삼성SDI 사장) 김승유(하나은행장) 김영수(이랜드 사장) 김영훈(대성글로벌에너지네트웍 회장) 김정태(국민은행장) 남중수(KTF 사장) 닉 라일리(GM대우 사장) 도기권(굿모닝신한증권 사장) 박세흠(대우건설 사장) 박용선(웅진코웨이개발 사장) 박일환(삼보컴퓨터 사장) 박종원(코리안리 사장) 박황호(현대자동차 사장) 송문섭(팬텍앤큐리텔 사장) 신상훈(신한은행장) 신은철(대한생명 사장) 심이택(대한항공 부회장) 오강현(가스공사 사장) 유호기(에쓰-오일 사장) 유석렬(삼성카드 사장) 윤종룡(삼성전자 부회장) 윤창번(하나로통신 사장) 이계안(현대캐피탈 회장) 이구택(포스코 회장) 이덕훈(우리은행장) 이문원((주)풍산 사장) 이상운((주)효성 사장) 이수광(동부화재 사장) 이용경(KT 사장) 이용구(대림산업 사장) 이인원(롯데백화점 사장) 이태용(대우인터내셔널 사장) 이해진(NHN 이사회 의장) 장흥순(터보테크 사장·벤처기업협회장) 전경두(동국제강 사장) 조충환(한국타이어 사장) 최길선(현대중공업 사장) 최준근(한국HP 사장) 표문수(SK텔레콤 사장) 하영구(한미은행장) 허동수(LG칼텍스정유 회장) 허영호(LG이노텍 사장) 허원준(한화석유화학 사장) 홍성일(한국투자신탁증권 사장)
■ 지난해는 어땠나
참여정부 원년인 2003년 한국경제의 성과에 대한 CEO들의 평가는 냉담했다.
1년 전과 비교한 한국경제의 경쟁력 수준을 묻는 질문에 '약간 후퇴했다'는 응답이 36%에 달했고, '크게 후퇴했다'는 답도 10%나 됐다. '1년전과 그대로다'라고 답한 CEO도 36%였다. 결국 전체의 82%가 '한국경제는 제자리 걸음 혹은 뒷걸음질쳤다'고 생각했으며, '약간이나마 개선됐다'는 응답은 고작 18%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의 약진, 일본의 회복 등 주변 정세 변화에 비춰볼 때, 기업인들이 느끼는 한국경제의 경쟁력 현 주소는 어떤 형태로든 특단의 돌파구가 절실함을 시사해준다.
소속 기업의 경쟁력 수준에 대해선 개선됐다는 응답(72%)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1년전보다 기업경쟁력이 후퇴했다'와 '답보상태다'는 응답도 각각 12%, 16%나 됐다.
현 정부의 성격규정에선 주목할 변화가 일어났다. 참여정부의 기업관에 대해 절반 이상(52%)이 '중립적이다'고 답했고, '반(反)기업적이다'란 응답은 12%에 불과했다. 지난해 8월 본보의 CEO 대상 설문조사에서 77%가 현 정부의 성향에 대해 '친(親)노동자-반기업적이다'고 답했고 '중립적'이란 응답은 16%에 그친 점을 감안하면, 지난 4개월간 정부의 기업친화적 색채는 크게 강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권 출범초 친노동자-분배우선적 성향이 짙었지만, 이후 정부가 노사간 '등(等)거리' 관계를 유지해왔고 정책기조 역시 성장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면서 참여정부의 경제적 색채에 대한 기업인들의 의구심은 크게 해소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성향을 잘 모르겠다'는 응답이 32%에 달한 점도 흥미를 끈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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