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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클린코리아/나는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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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클린코리아/나는 고백한다

입력
2004.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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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경찰청 특수수사과. 어이없는 첩보가 포착됐다. 끝 없는 뇌물 요구에 지친 한 건설업체 사장이 공사를 포기하고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시청 공무원과 감리단 직원들을 협박하고 있다는 것. 수사가 진행되면서 속속 드러난 공무원과 업자의 뇌물 커넥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뿌리는 근원적이었고, 가지는 총체적이었다. 하지만 수사진을 더욱 경악케 한 것은 ‘설마 그렇게까지’라며 혀를 내두르던 비리의 정황들이 업계의 ‘상식’이더라는 것. 게다가 업자들은 ‘설마 그것밖에’라며 머리를 젓더라는 것이다. 관련자들은 취재진의 협조 요청을 철저히 외면했다. 다음은, 수사 당시 피의자 진술과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드러난 그들의 검은 거래의 경과를 재구성한 것이다. /편집자주

■공무원과 건설업자의 뇌물 커넥션

지역에서 꽤나 알려진 D건설사가 시청이 발주한 하수종말처리장 공사를 따낸 것은 2000년 12월. 대기업에서 잔뼈가 굵어 업계 관행을 꿰고 있던 A사장이다. 그는 이듬해 9월 추석 전 시청 상하수도사업소 계장 B씨에게 400만원을 건넸다. 하지만 돈은 즉각 되돌아왔다. 깜짝 놀란 사장은 부랴부랴 2,000만원을 만들어 다시 시청을 찾았고, 가까스로 ‘성의’는 전달됐다.

착공 후에도 사장은 계장과 식사를 하면서 회식비로 300만원, 휴가철 휴가비 200만원을 건넸으며, 출장비와 자잘한 용돈까지 전화 오기가 무섭게 상납했다. “절반은 자진 상납, 나머지는 옆구리를 찔러서 갖다 바쳤습니다.” 설계변경 전이나 공사대금 수령 전에는 뭉칫돈이 필수였다. B계장 창구로 전달된 촌지는 1년6개월 동안 모두 4,900만원이었다.

계장이 창구이긴 했으나 ‘윗선’인 사업소장에게는 따로 ‘기름칠’을 해야 했다. 사장은 소장에게 8차례에 걸쳐 700만원, 2002년 4월 부임한 과장에게 모두 550만원을 찔러줬다. B계장은 자신이 수금한 돈으로 소장에게 1,500만원, 과장에게 60만원의 ‘용돈’을 전달했고, 나머지는 부서 행사비, 직원 출장ㆍ교육 여비로 썼다고 말했다.

감리단은 한 술 더 떴다. 30대 중반의 감리과장 2명은 걸핏하면 “술 한잔 하자”며 업체 직원들을 불러냈다. 제철 횟집에서 시작되는 주흥은 으레 룸살롱까지 이어졌고, 매번 200만원 정도의 돈이 들었다. 귀가 때는 10만~50만원씩 준비한 봉투를 건넸다. 감리단 직원 휴가비는 기본이었다. 출장가면 주유권, 돌아오면 세차비를 챙겨줘야 했다. 감리단 사무실의 TV와 신발장, 자명종 시계까지 사주는 등 감리단 사무실 살림을 도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장사무소 총무가 작성한 ‘감리단 투입비’라는 비망록에는 ‘감리과장 현금요구 50만원, 룸살롱 150만원, 상품권 20만원, 단장 세차비 2만6,000원, 우족세트 15만원, 휴가비지급 110만원, 설계변경출장비 100만원, 주유상품권 30만원’ 등 모든 사항이 날짜별로 꼼꼼히 적혀 있었다. 이 돈은 2001년 10월부터 13개월 동안 43차례 2,300만원에 달했다. 감리단을 상대로 한 사장의 직거래는 별도였다. A사장은 감리단장에게 골프접대, 룸살롱 향응 외에 12차례 1,200만원을 주었고, 과장 2명에게도 40차례 2,500만원을 건넸다. .

그러나 감리단의 횡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직원이 불손하다”며 갈아치우라는 요구에 현장소장을 3차례나 교체해야 했고, 미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경우에는 ‘회사가 어떻게 망하는지 보여주겠다’는 폭언까지 들어야 했다.

시청과 감리단에 이렇게 뜯긴 돈이 70여 차례에 걸쳐 모두 1억2,000만원. 물론 업계 관계자들은 드러난 것에 코웃음을 쳤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공생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어찌 된 셈인지, 공사 규모를 뻥튀기하려던 사장의 설계변경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감리단의 지적은 많아졌고, 시청에 보낸 서류들도 반려되기 일쑤였다. 공사진척이 안되다 보니 6개월 동안 일을 못해 결국 버는 돈 보다 들어가는 돈이 많아졌다. 할 만큼 했다고 믿었던 사장으로서는 불만이 생길 수 밖에. 거기다 그는 감리단장이 “(사장) 손을 좀 봐줘야겠다”며 벼르고 있다는 말을 직원을 통해 듣게 됐다. “공사를 하기 위해 모든 걸 시키는 대로 했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는데 그럴 수는 없는 겁니다.” 사장은 보복을 결심했다.

지난 해 12월 말. 공사를 포기한 사장은 현장직원을 철수시킨 뒤 B계장과 감리과장을 찻집으로 불러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 동안 쏟아 부은 돈과 공사 중단에 따른 피해액 등 3억5,000만원을 내놓지 않으면 검찰에 폭로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업을 계속하는 한 자신들에게 꼼짝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고, 본때를 보였으니 두툼한 봉투가 준비돼 있을 것으로 믿고 나간 자리에서 B계장과 감리과장은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당황했고, 다급하게 협상에 나섰다. 지난 1월 부랴부랴 계장이 7,500만원을 마련하고 감리단이 2,500만원을 만들어 1억원을 반환했다. 하지만 사업까지 포기하며 칼자루를 쥐게 된 사장은 나머지 돈을 집요하게 요구했고, ‘목을 떼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이들의 추잡한 뇌물파티는 견디다 못한 감리과장이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림으로써 막을 내렸다.

A사장과 B계장, 감리단의 과장은 구속기소 됐고, 감리단장과 또다른 과장은 불구속 기소됐다. B계장은 파면됐지만 감리단 과장들은 감봉 조치로 그쳤고, A사장은 최근 건설업을 재개했다.

최수학 기자 shchoi@hk.co.kr

■전 건설업자의 뇌물 고백

“업자로 지낸 지난 15년은 ‘공무원들의 똘마니’ 생활이었습니다.” 수 차례의 설득 끝에 만난 지방 중소건설업체 사장 출신 김모(47)씨. 그는 자식들 보기 부끄럽고, 후환이 두려우니 신분을 감춰달라는 말을 거듭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토로했다. 다음은 어렵사리 이어 간 그의 술회.

30대 초반 건설업에 뛰어들자마자 업계의 오랜 관행인 공무원과의 먹이사슬 메커니즘을 익혀나갔습니다. 따로 배울 것도 없었죠. 공무원들이 돈을 넙죽넙죽 받아주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이상의 보답이 반드시 돌아오기 때문이죠. 거의 매일같이 그들과 술을 마셨고, ‘형님, 동생’하며 친하게 지냈습니다.

돈은 늘 현찰로 준비했죠. 설날과 추석은 물론이고, 연말연시와 여름 휴가철에는 어김없이 선물과 현금, 상품권을 건넸습니다. 공사를 따내면 시청ㆍ군청의 재정과 직원에게 선납하고, 며칠 후 계약하러 갈 때는 따로 ‘사례금’을 준비했죠. 처음부터 쩨쩨하게 굴면 안됩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셈이죠.

공사를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바빠집니다. 담당직원, 계장, 과장, 국장에게 수시로 ‘인사’를 해야 하거든요. 청탁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중장비는 누구 것을 써주고, 전기설비는 아무개 회사에 하청을 주라”는 주문이 쏟아지거든요. 그 뿐입니까. 파출소, 교통 경찰, 면사무소 직원, 심지어 어떤 경우는 마을 이장들까지 온통 뜯어먹으려고 달려듭니다. 설계 변경해 공사비를 늘릴 때는 목돈이 들어갑니다. 독한 공무원들은 거의 반타작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이 급한 명절을 앞두고는 기성(공사대금)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아요. 반드시 뇌물을 줘야 공사비가 지급된다니까요. 돌이켜 보면, 사업하면서 행복했던 기억은 공사를 낙찰 받는 날 오후 한나절에 불과했습니다.

또 뇌물만으로는 만족을 안합니다. 검찰이나 경찰에서 잡음이 불거지면 곁에서 거들어야 하고, 가족이 아프기라도 하면 대학병원 병실 구해주고 병원비까지 내줘야 합니다. 초상이 나면 부의금은 기본이고, 직원들 데리고 가서 밤까지 새야 하죠. 이런 청탁을 해결할 수 있어야 유능한 사업가로 인정받기 때문에 평소에 검찰, 경찰, 의사, 변호사들과도 돈독한 교분을 쌓아야 합니다. 새벽에 전화 받고 술값 계산해주러 나간 일은 셀 수도 없습니다. 술주정이 심한 공무원들도 많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하인처럼 대하는 때도 다반사죠. 친구들과 기분 좋게 술 한잔 못하고, 집에서는 가장 구실 못하면서도 그런 술자리 잘 치러내야 하죠.

뜯어먹는 것으로 성이 안차는 지 아예 자기가 사업을 하는 간 큰 공무원들도 있습니다. 마누라나 친척 명의로 사업체를 만들어 관급공사를 그 회사에 발주하거나, 우회적으로 큰 회사에 주고 하청을 받도록 하는 수법을 쓰죠.

더러워도 참아야 하고, 알아도 모른 체 해야 합니다. 내 회사의 이득을 위해서는 이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제 경우는 어림잡아 연간 200억원 규모의 공사비 가운데 10%인 20억원을 로비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윤이 적을 때는 한푼도 남기지 못하거나 손해 볼 때도 있었죠. 그렇지만 사업하면서 살만큼 돈을 모았으니 저도 ‘사업’을 제법 잘한 셈입니다.

물론 깨끗하고 양심적인 공무원도 가끔 있죠. 트집잡아서 업자들을 괴롭히지도 않고, 고마워서 뇌물을 줘도 사양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금방 밀려나더군요. 부정하게 돈과 이권을 챙긴 공무원들이 승진해서 상급자로 버티고 있으니, 부패사슬의 중간에 끼어있는 공무원이 저 혼자 깨끗해서는 버티지 못하는 거죠. 대기업 하청 공사도 해봤지만 공무원들처럼 지저분하지는 않아요.

세상이 다 그렇다고 자위하면서 버텨왔지만, 돌이켜보면 끔찍하고 부끄럽습니다. 누구 말처럼 쓸개는 집에 떼놓고 살아온 셈이죠. 다시는 그 생활 못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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