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당국의 허술한 혈액관리로 60대 남자 2명이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제보한 대한적십자사 직원 A씨. 14년째 적십자 혈액원에서 근무해온 A씨는 적십자사측이 에이즈환자 비밀 누설 혐의로 고소, 지난해 12월4일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A씨는 검찰의 불구속 조치로 풀려났지만, 적십자사측은 이 과정에서 수혈사고에 대한 대국민 사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내부고발자' 색출에만 열을 올렸다.수사과정에서 부패방지위원회가 부패방지법상 내부고발자 보호조항을 들어 수사중단을 요청했지만 검찰은 형사소송법 절차에 따라 고소인의 취하가 없다는 이유로 수사를 계속했다. 부방위 관계자는 "내부고발자에게 소속 기관장이 신분상 불이익을 가할 경우 과태료 부과, 징계처분 등의 처벌을 할 수 있지만, 이번 경우처럼 형사 고발시에는 형소법과의 충돌이 생겨 사실상 제보자를 보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내부고발 증가추세
2002년 1월25일 부방위 출범과 함께 도입된 내부공익신고제도가 시행된 지 1년 11개월.그동안 접수된 신고 건수는 총 4,044건, 이 중 부패행위 관련 사항은 237건이었고 내부고발자 신고비율도 2001년 27.7%에서 지난해 35%대로 크게 증가했다. 부방위에 따르면 내부고발에 따른 부패적발율은 일반신고에 비해 5∼10% 가량 높고, 부패신고에 따른 환수예정금액 84억원중 81%인 67억원이 내부고발에 따른 것으로 분석될 만큼 내부고발자 신고제도가 부패척결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방위 보호보상과 강은호 과장은 "부패방지법 시행 이후 내부고발이 부패척결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공익신고자의 신분보호 강화와 보복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등 내부공익신고 활성화 방안을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강 과장은 "내부고발제를 시행중인 외국의 경우 신고건수의 99% 이상이 투서 수준이나 우리의 경우 6∼7%가 공익신고에 해당돼 신뢰도가 더욱 높다"고 덧붙였다.
허술한 내부고발자 보호제
지난해 4월 부패행위를 신고한 공무원 김모(48)씨에게 보복성 인사를 가해 부방위로부터 원상회복 요구를 받고도 불응한 경기 A시 시장에게 과태료 500만원이 부과됐다. 이는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복행위를 처벌한 첫 사례였다. 하지만 부방위의 조치에도 불구, A시 시장은 김씨에 대한 하향 전보 조치를 아직도 철회하지 않고 있다. 부패방지법 제32조 6항은 '부방위로부터 신분보장 조치 요구를 받은 해당 기관장은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부방위에는 조사권 수사권 등 강제력이 없다. 현 부패방지법에는 '왕따' 등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나 보복행위에 대해서는 보호 조항이 없다. 또 사용자의 보복행위가 입증된다 해도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벌만 가능하다. 지난해초 대전국세청의 세무비리 의혹을 제기한 공무원 한모(46)씨는 당시 "조직내의 은밀한 불이익도 참기 힘들었지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왕따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적십자사의 허술한 혈액관리 실태를 고발한 A씨도 "회사는 물론 노조까지 사기저하와 명예실추를 들어 조직의 배신자로 내모는 것을 보고 허탈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내부고발자 보호제 개선 시급
부방위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 제도개선을 추진중이다. 부방위 관계자는 "현재 왕따 등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도 보복행위로 간주해 금지하고, 보복행위 입증책임도 피신고인측으로 전환하는 제도를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부방위는 이밖에도 대리출석제·익명재판제 등을 통한 신분비밀조치 강화 불이익 처분 원상회복 요구 불응시 형사처벌 보상금 지급요건 완화 직무상 비밀준수 의무위반에 대한 면책조항 신설 등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부방위는 또 부방위의 권한이 신고사건 '심사'에만 한정돼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판단, 조사권 확보를 추진중이나 검찰 등 수사기관의 반대와 정치권의 비협조로 답보 상태다.
중앙대 행정학과 박흥식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내부고발은 여전히 조직과 동료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는 배신행위, 혹은 빗나간 영웅주의로 치부되고 있다"며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해서는 내부고발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만큼 껍데기뿐인 내부고발자 보호제도를 개선해 건전한 내부고발을 더욱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고발자보호 노사협약에 포함을"/공익제보자 1호 이문옥씨
"공무원이든 노동자든 국민이라면 누구나 부패행위를 알게됐을 경우 이를 신고해야 합니다."
1990년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재벌 로비로 중단된 사실을 폭로, '공익제보자 1호'로 꼽히는 이문옥(사진) 전 감사관은 현재 민주노동당 고문 겸 부패추방운동본부장을 맡아 부패추방 최일선에서 활동중이다. 이 고문은 불법 대선자금 등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정치권에 흘러들어가고, 이는 다시 기업과 노동자들의 발목을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며 "우리도 영국처럼 노조가 기업 내부의 비리를 자유롭게 고발할 수 있도록 부패방지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고문은 이 같은 생각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직원이 사내 비리나 부패행위를 고발했을 경우 이로 인한 신분상 불이익이나 근무조건상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노사 단체협약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다.
"실제 사기업의 부패행위를 근로자가 고발했다 보복성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현 부패방지법은 국가기관 또는 유관기관 소속 공직자만 내부고발자로 보호합니다. 정치부패와 동전의 양면관계인 기업비리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업 내부의 비리고발 또한 공익제보로 보호해야 합니다."
이 고문은 최근 인기드라마 '대장금'의 한 상궁과 장금이를 내부고발자로 묘사한 '대장금 관전법'을 당 홈페이지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 상궁의 친정과 공범관계에 있는 자들은 대통령 측근비리 연루자들로, 최 상궁의 편에서 입맛대로 조사를 끼워맞추는 사헌부 종사관들은 검찰, 위험을 무릅쓰고 조사에 나선 민정호는 특검으로 비유할 수 있다는 게 이 고문의 '대장금 관전법'. 이 고문은 "한 상궁과 장금이의 역할에서 내부고발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깨닫게 된다"며 "훈습(薰習)이란, 향 냄새가 옷에 밸 정도로 습관을 들인다는 뜻인데 부패방지법이 국민들에게 이같은 존재가 되어야 부정부패를 제대로 뿌리뽑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명수기자
美 "용기있는 고발, 그들이 영웅" 타임 "2002 인물" 9·11대응 비판한 前FBI요원
지난해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2년 올해의 인물로 전 연방수사국(FBI) 요원 콜린 롤리(48·여·사진) 등 3명의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를 선정했다. 정치지도자, 기업가, 전쟁영웅 등 유명 인사를 선정해온 타임지가 무명의 내부고발자들을 선정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직업, 사생활, 건강 등을 잃을 위기에 처하고, 더구나 동료들의 증오심까지 감수해야 했던 이들을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9·11 테러 당시 "FBI가 테러를 막는 데 실패했다"고 폭로한 전 FBI 미니애폴리스 지부 요원 롤리는 9·11 테러 한달 전쯤 용의자 자카리아스 무사위를 체포한 뒤 본부에 수사 확대를 요청했다. 그러나 FBI 본부는 '범죄혐의 불충분'을 이유로 영장청구를 거부했고,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테러공격을 위해 미국의 항공학교에서 비행훈련을 받고 있다'는 아리조나주 지부의 보고도 묵살했다. 막상 전대미문의 테러가 발생하자 로버트 뮬러 FBI 국장은 "테러공격에 대한 사전 정보를 FBI가 갖고 있었더라면 어떠한 조치라도 취했을 것"이라며 사전정보 인지사실을 잡아뗐다. 뒤어어 FBI 본부의 무능함과 관료주의적 행태가 속속 공개되자 "수사를 했더라도 테러공격 자체는 막지 못했을 것"이라고 교묘하게 말을 바꿨다. 논란이 정치권과 행정부간 소모적 공방으로 이어지자 보다 못한 롤리는 FBI 본부의 무능한 일 처리와 이를 은폐하기 위한 교묘한 말바꾸기 과정을 상세히 적은 편지를 공개했다. 결국 롤리의 내부고발은 부시 행정부로 하여금 FBI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토안보부 설치 등 테러방지 대책을 수립하게 했다. 롤린의 예는 미국 시민사회의 철저한 내부고발자 보호에서 그 원동력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내부고발제도를 도입한 미국은 89년 '내부공익신고자 보호법'을 제정, 민간 부분에도 적용하고 있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보복성 인사 방지와 '특별검사부' 설치를 골자로 한 이 법안은 '조직 비리를 폭로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미국인들의 인식을 '용기있는 고발이 사회를 개혁한다'는 쪽으로 바꿔놓은 시민사회의 위대한 승리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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