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결혼한 부부가 반지하 방에서 2003년 12월31일 밤을 보내고 있다.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따뜻한 부부의 집에 남편의 지인인 영화감독이 왔다 간다. 분장사인 남편이 만들던 마네킹이 눈 뜬 채 누워 있고, 창에는 언제 왔는지 도둑고양이가 앉아 있다. TV에서는 서울시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올해의 마지막 날 마지막 손님은 과연 누구였을까? 원숭이해를 하루 앞두고 원숭이띠 소설가 김영하씨가 짧은 소설 '마지막 손님'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아무래도 저녁을 차려야 하지 않을까?"
영선은 고무장갑을 벗어 들며 거실 쪽을 향해 물었다. 부엌과 거실 사이엔 두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호두색의 2인용 식탁이 있었다. 식탁 너머에선 정수가 등을 보인 채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밥은 무슨. 금방 왔다 갈 거야. 신경 쓰지 마." 정수는 목장갑을 낀 왼손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영선은 마른 행주로 싱크대를 훔쳤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개수대 위쪽으로 난 창에 시선을 주었다. 가끔 도둑고양이가 창틀에 앉아 빤히 그들의 반지하 방을 내려다 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영선은 먹다 남은 생선 꼬리라도 던져주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정수가 가는 붓을 물통에 담가 헹구자 영선은 그 물통을 화장실 변기에 가져가 비웠다. 그리고 새로 물을 받았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온다는 거야? 그것도 오밤중에."
거실에 켜놓은 텔레비전에선 보신각 타종을 구경하러 종로로 몰려드는 인파를 보여주고 있었다.
"뭐, 자기도 궁금하겠지."
"내년이 원숭이 해라지?"
영선은 물통을 가져다주며 정수의 어깨에 살며시 자기 손을 얹었다. 정수는 씩 웃으며 여러 색의 물감을 섞어 자신이 원하는 색을 만들고 있었다.
"너, 원숭이지?"
"응."
영선은 스물 넷이었다. 미술로 유명한 대학의 조소과를 졸업했고 졸업장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같은 과 선배인 정수와 결혼했다. 청첩장을 돌렸을 때 믿지 못했던 친구가 많았을 정도로 이른 결혼이었다. 그녀는 인터넷 회사에 취직해 그래픽 디자인 일을 했고 남편은 아는 사람의 소개로 한 영화사의 미술부에 들어갔다. 벤처기업에 다니는 영선도 바빴지만 정수는 더 했다. 밤샘 작업이 날마다 이어졌다. 일정이 넉넉한 영화는 한 편도 없었다. 공사판의 노동자처럼 장도리와 망치를 끼고 살았다. 며칠 만에 뚝딱뚝딱 근사한 세트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렇게 만든 세트를 단 몇 시간 만에 박살내기도 했다. 미술부의 일이라는 게, 잘한 건 여간해서 티가 안 나고 못한 건 눈에 확 띄었다. 그러니 칭찬보다는 욕을 많이 먹는 일이었다. 영선은 그런 곳에서 썩히기엔 남편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입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일주일 전, 정수는 화방에서 재료들을 사와 집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이게 다 뭐야?"
"시체가 필요하다는군. 감독이 전공을 살려보래."
정수가 최근에 시작한 영화는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였다. 시나리오 상으로는 모두 다섯 구의 시체가 등장하는데 그 중 네 구는 배우들을 특수분장시켜 찍을 생각이었다. 나머지 한 구가 미술부의 몫이었다. 마네킹에 분장을 하고 적당한 변형을 가해 진짜 시체처럼 만들어야 했다. 정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조소과에서 5년 동안 익힌 기술과 영화판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기법을 모두 동원해 그야말로 그럴듯한 여고생 시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같은 과 후배였던 영선도 틈틈이 그를 도왔다. 마네킹에 입힌 교복도 영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결혼식의 부케도 시들지 않은 신혼이었다. 영선은 정수와 함께 학창시절처럼 함께 뭔가를 만들고 있다는 게 행복했다. 비록 그것이 살해된 여고생의 마네킹일지라도.
"감독은 언제 온대?"
"아까 핸드폰 왔는데 거의 다 왔대."
"혼자 오는 거야?"
"응."
"결혼했어?"
"했었지. 몇 달 전에 마누라가 뉴질랜드로 떴어. 중학교 다니는 딸까지 데리고."
영선은 물끄러미 남편의 손동작을 지켜보았다. 그의 붓은 붉은 물감을 찍어 입가에서 목으로 흘러내리는 핏자국을 그리고 있었다. 가장 섬세한 터치를 요구하는 얼굴 부분에서 그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거무틱틱하게 부패해 들어가기 시작한 목줄기는 정말 감쪽 같았다. 만약 도둑이 들어와 이 마네킹에 발이라도 걸려 넘어졌다면, 아마 심장마비에 걸려 제 명에 못 살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며 영선은 쿡, 웃었다.
"뭐가 웃겨?"
"아니야. 아무 것도. 음. 이제 다 끝나 가네?"
"자기도 고생 많았어. 감독만 오케이하면 내일부턴 좀 쉬자. 가까운 온천에라도 다녀올까?"
"늙은이들처럼 무슨 온천?"
"새해잖아."
정수는 무심코 마네킹을 훑어보다가 발쪽을 가리켰다.
"어, 저 발 좀 제껴라. 너무 똑바로잖아. 시나리오엔 달아나다 발목이 부러지는 걸로 돼 있어."
영선은 여고생 마네킹의 오른발을 잡아 살며시 비틀었다. 그러나 의외로 완강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힘껏 바깥쪽으로 발목을 비틀어 젖혔다. 으드득. 발목이 돌아갔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로 그때 딩동, 벨이 울렸다. 정수는 붓질을 멈추었고 영선은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여니 안경을 쓴 감독이 서 있었다. 영선은 가끔 신문의 연예면에 등장하는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감독님이시죠? 들어오세요."
감독은 조용히 합성세제가 담긴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신혼집에 그냥 오기가…"
영선은 세제통을 받아 식탁 옆에 세워놓았다. 감독은 파카도 벗지 않고 바로 정수가 서 있는 거실쪽으로 걸어갔다. 정수와 목례를 나눈 후, 마치 강력계 형사처럼 거실에 벌거벗은 채 가로 누워 있는 시체 모형을 조심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거구만."
"네."
장난을 하다 들켜버린 어린아이처럼 정수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가는 것을, 영선은 슬쩍 훔쳐보았다. 졸업작품이나 전시회 출품작을 완성했을 때, 정수는 언제나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겐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감독은 그런 정수에겐 관심이 없었다.
"잘 나왔네."
감독이 쯥, 입맛을 다셨다. 영선은 정수의 눈치를 살피며 감독에게 물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 네 좋지요."
영선은 감독을 그들이 아침마다 얼굴을 마주하는 식탁으로 안내했다. 감독은 파카를 벗으며 의자에 앉았다. 정수도 장갑을 벗고 감독의 반대편에 마주 앉았다.
"벌써 올해가 다 가다니."
감독이 부엌 벽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수가 12월치 달력을 부우욱, 뜯어냈다.
"고생 많았겠어."
"뭘요."
"시체는 처음이지?"
"네. 근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그럴 거야."
"감독님도 미스터리는 처음이시죠?"
감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으로 제 양 볼을 쓰다듬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피로해보였다. 영선은 커피메이커에서 포트를 분리해 감독과 남편에게 커피를 따라주었다. 감독은 설탕을 넣고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영선은 작은 스툴을 가져다 그들 사이에 앉았다.
"크랭크인은 언제에요?"
"뭐, 곧 하겠죠."
감독은 어깨를 슬쩍 치켜올리고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거렸다. 영선은 그런 남자들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에 불투명한 태도를 보이면서 심지어 그것을 멋으로 생각하는 남자들. 그는 도대체 왜 이혼을 당했을까? 생각해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감독의 눈길은 계속 거실에 누워있는 여고생 마네킹 쪽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정수와 영선의 시선도 움직였다. 결국 셋의 시선은 교복을 입은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고생 마네킹으로 모였다. 영선이 물었다.
"다 된 거 같은데…언제 가져가실 거예요?"
"…여기 며칠 좀 놔둘 수 없을까요?"
"왜요?"
"가져가도 마땅히 놓을 데가 없어서요. 아직 우리 팀 사무실이…"
영선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입가에 피를 흘리는 마네킹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눈 앞에 있으면 끝없이 수정을 계속하는 정수의 성품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가져갈 데가 없다는 데야.
감독은 커피잔을 깨끗이 비운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거실에 가로 누운 여고생을 힐끗 훔쳐보고는 현관에서 검은 구두를 신었다. 구두 주걱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포기하고 그대로 뒤꿈치를 밀어넣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반지하의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둘은 거실로 돌아와 다시 마네킹 옆에 모여 앉았다. 물감을 풀며 정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것 봐라. 얘가 원래 눈을 뜨고 있었던가?"
정수의 손이 마네킹의 눈을 가리켰다. 이런 장난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영선은 새삼 그 눈빛의 생생함에 놀라 가벼운 몸서리를 쳤다.
"왜 이래?"
영선이 눈을 흘기며 정수의 팔을 살짝 때렸다. 어디선가 야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턱에 흰줄무늬의 도둑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영선은 창쪽으로 걸어가 고양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쾅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창문을 닫았다. 바로 그때 텔레비전에선 카운트다운을 하는 서울시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뎅, 뎅, 뎅. 서른세 번의 둔중한 종소리와 함께 새해가 시작되었다. 종로에 모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수가 텔레비전을 끄자 액체처럼 끈적한 침묵이 그들의 반지하 신혼방으로 스르르 내려와 차곡차곡 고였다. 새해였다.
작가 약력
1968년 강원 화천 출생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95년 계간 '리뷰'에 단편 '거울에 관한 명상'으로 등단
소설집 '호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랑은 왜' '검은 꽃' 등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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