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나는 흔히 '엄마 오십'이라고 줄여 부른다. 일종의 애칭인 이 이름은 내가 '엄마 오십'에 대해 품고 있는 질기고 강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엄마 오십'이 남긴 에피소드와 사연이 많다.'엄마 오십' 하면 우선 속치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연극에서 속치마가 버젓이 하나의 의상으로 승격한 것은 '엄마 오십' 말고는 별로 보질 못했다. 극중에서 엄마는 여섯 벌의 옷을 갈아 입는다. 평범한 아줌마용 원피스와 코트, 딸이 선물해 준 파란색 원피스, 다소 어지러운 꽃무늬 원피스, 병원에서 입는 가운, 그리고 속치마다. 그런데 속치마는 어떤 옷보다 중요했다. 집안에서 아무렇게나 옷을 벗는 엄마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나는 무대 위에서 스스럼없이 속치마 차림이 돼야 했다. 잘빠진 몸매도 아닌데 무대 위에서 속치마 차림을 하다니.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대단했다.
관객에게는 '여자'가 아닌 '엄마'로서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배우 아닌가. '엄마'를 연기하더라도 옷 갈아입을 때만은 여자로 보여지고 싶기도 했다. 남자 관객들이 많은 날이면 더욱 긴장이 됐으니 그걸 달리 무어라고 설명할까.
남들은 우습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무대에서 입을 속치마를 신경을 많이 써서 골랐다. 오십이라는 나이와 중하류의 생활 수준을 감안하면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야 하고, 레이스가 요란해서는 안 되며, 그저 펑퍼짐한, 말하자면 '섹시'와는 거리가 멀어야 했다. 여성이 아니라 '엄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했기 때문이다. 용산 보세 가게에서 그걸 살 때는 무엇이 그리 창피했던지 점원에게 할머니가 입을 옷이라고 둘러댔다. 딱 1만6,000원을 주고 산 속치마는 가격에 비해 효용이 만점이었다. 300회를 공연하는 동안 한 번 공연에 두 번씩 원피스를 갈아 입었으니 정확하게 600번이나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싸구려 속치마는 무대 위에서 입었던 어떤 의상보다 애착이 가서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한편으로 '엄마 오십'은 통렬한 아픔, 몸의 지옥체험으로도 기억에 남았다. '엄마 오십'을 공연할 때 나는 오십견을 앓았다. 오른쪽 팔을 위로 올릴 수 없었다. 아예 어깨가 비뚤어진 것 같았다. 잘 때는 앓는 소리가 저절로 입을 비집고 나왔다. 딸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왼손으로 했고, 원피스를 갈아 입을 때는 지퍼를 올릴 수 없어 딸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처리했다.
그러다가 어느날엔 발까지 삐었다. 평지낙상이라고, 그냥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는데 맥없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발등의 뼈가 우두둑했다. 순간 "큰일 났다, 연극을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발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데 꼭 거짓말 같았다. 그날은 휴일이었고 2회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문을 연 병원도 없었다. 발이 너무 부어 신발을 신을 수도 없었다. 그날 나는 절름발이 오십 엄마로서 무대에 서야 했다.
발을 저는 오십의 엄마가 뭘 발견할 수 있을까? 목발? 나는 눈물이 났다. 아파서가 아니라 약이 올라서. 왜 내가 조심을 못했지? 최상의 컨디션으로 관객 앞에 서지 못한 미욱함이 한심하고 미웠다. 무대 인사를 하면서 관객에게 말했다. 배우는 아플 권리도 없는데 오늘 그런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다. 발을 삐어서 좋은 공연을 할 수 없었다. 최상의 무대를 보여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들은 오히려 박수를 쳐주었다. 발에 쑥찜이라도 하듯 뜨거운 박수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