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684 부대 해체를 명령했다고요? 미국은 몰랐을 겁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결정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실미도 부대원 3명이 살아있다고 영화 '실미도' 원작자인 백동호씨가 얘기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23명이 섬에서 나와 19명이 폭사했고, 4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처형됐습니다. "1968년 '박정희 목을 따러 왔다'는 북한 특수부대의 서울 침투 사건 직후인 4월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는 특명을 받고 영종도 앞 무인도인 실미도에 급조된 세칭 '684 부대'(정식 명칭 2325전대 209파견대)를 그린 영화 '실미도'(감독 강우석)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영화 속 사건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비등하고 있다. 당시 공군 정보부대 중사로 '684 부대'의 소대장으로 파견돼 훈련을 맡았던 김방일(58)씨는 영화에서 허준호가 맡은 조 중사의 실제 인물로 살아 남은 6명 중 한 사람이다.
"이후락이 북한에 갔다 오더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970년 10월 중앙정보부에서 해체 명령이 떨어지자 우선 보급 지원이 형편없어졌지요. 처음에는 쇠갈비에 담배, 월급까지 나왔는데 그 때부터는 단무지와 보리쌀 몇 자루를 던져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훈련병들은 그때 버림받고 있음을 직감했던 겁니다."
그는 71년 8월23일 훈련병들이 교관 17명을 사살하고, 서울 대방동으로 질주한 '실미도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사건 전날인 8월22일 훈련병의 유탄에 맞은 어부의 병 문안을 하러 인천에 갔지요. 돌아오는 배가 막 떠났는데 약혼녀의 전화가 왔습니다. 이를 보고 부대장 김순웅 상사(작고)가 '너는 하루 쉬고 오라'고 해서 바다로 뛰어 내려 인천으로 돌아갔지요." 이렇게 죽음을 피한 그는 이튿날 아침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는 뉴스를 듣자 "우리 애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바로 배를 타고 실미도에 들어가니 해변, 연병장에 수십 군데 총을 맞은 동료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고, 내 침상에는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는 쪽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같은 숙소에 기거하며 정을 나눈 그에게 훈련병들이 마지막 편지를 남긴 것이었다.
김씨는 "20∼31세의 훈련병 가운데 40∼50%는 강도나 깡패 출신이었지만 나머지는 일반인이었다"며 "부대원 모두가 살인범 등 범죄자였다는 건 영화적 과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서 훈련 강도가 비교적 약하게 그려졌다고도 지적했다. 31명의 부대원 가운데 3명이 무의도 교사 강간 사건으로 총살된 것을 빼고도 1명이 수영 훈련 중 익사했고, 1명은 하극상으로 군인들에게 맞아 죽는 등 실제 훈련은 훨씬 더 참혹했다고 회상했다.
90년 10월 19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준위로 예편한 그는 93년 고향 청주에 냉난방설비업체를 차렸지만, 여전히 실미도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98년 생존자 6명을 포함한 '실미전우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고 있으며 최근 '실미도의 증언'(낮은목소리 펴냄)도 냈다.
"실미도의 기억 때문에 정신분열증을 겪는 바람에 공무원 채용에서 떨어지고 택시기사를 하는 동료도 있습니다. 북파공작원에 대해 정부가 보상법을 마련한다는데 실미도는 여전히 역사 속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도 목숨 걸고 살았던 사람들 아닙니까?"
/박은주기자 jupe@hk.co.kr
사진=김현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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