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는 산울림 소극장에서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공연했다. 91, 95년에 이어 세 번째다. '엄마는 오십에…'를 할 때마다 나는 궁금해진다. 이 작품을 '울지 않고 볼 수 없다'는 신파조 문구 말고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을까. 수 많은 엄마와 딸들이 이 연극을 같이 보러 왔고, 또 같이 울었다.1991년 산울림에서 공연 중인 윤석화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러 갔을 때 산울림에서 다음 작품으로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 내 나이 딱 오십이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오십에…'는 꼭 내가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산울림 대표인 임영웅 선생도 이심전심으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본을 받아 든 순간 김이 샜다. TV드라마처럼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연습을 마치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자 그런 걱정은 싹 가셨다. 하면 할수록 웅숭깊은 작품의 맛을 느끼게 됐으니까.
드니즈 살렘이 쓴 '엄마는 오십에…'는 배운 것 없고 가난하지만 자식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과 애정을 지닌 전형적 '엄마'와 독립적 삶을 추구하는 딸 '그라시'의 이야기다. 엄마와 딸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원초적 애증을 그린 이 연극은 딸이 엄마의 주검을 앞에 두고 지난날을 회상하며 글을 쓰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오로지 자식에게 동물적 사랑을 쏟아 붓는 엄마, 그녀와 함께 살며 작가의 꿈을 키우던 딸. 둘의 팽팽한 긴장은 결국 딸의 가출, 혹은 출가로 깨진다. 혼자 남겨진 엄마는 나이 오십에 처음으로 바다를 찾아가 소중한 '자아'를 발견하지만 곧바로 나팔관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다. 자신의 책이 처음 출판돼 기쁨에 들뜬 딸은 그 소식을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전하고 미국 여행을 떠난다. 딸이 다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엄마는 오십에…'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여서 모녀가 함께 보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객석에서는 엄마와 딸이 손을 꼬옥 잡고 연극을 지켜보면서 이따금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다가 엄마가 울면 딸이 따라 울고, 딸이 울면 엄마도 따라 울었고 조심스럽게 손수건이나 화장지가 오갔다. 당시 고3이던 딸 연수도 친구들과 함께 구경을 왔다. 딸 아이는 공연이 끝나고 눈이 빨갛게 부어서 분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공연 내내 자신만 쳐다보느냐며, 내가 잔인하다고 왈칵 울음을 쏟아냈다. 물론 공연 중에 딸에게 눈길을 준 적도 있지만 그렇게 계속 쳐다봤을 리는 없었다. 아마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엄마는 오십에…' 공연에 우리 어머니가 오셨을 때 나는 마찬가지로 영락없이 부끄러운 딸이었다. 분홍색 한복까지 곱게 차려 입고 아들, 며느리와 함께 극장을 찾으신 어머니 앞에서 나는 '엄마는 오십에…'를 연기했다. 영원한 내 고향이신 그 분 앞에서 '엄마'를 자처했던 것이다. 커튼콜 때 오늘의 공연을 어머니께 바친다고 말하는 순간 눈물이 회한처럼, 설움처럼 그렇게 한없이 쏟아졌다. 울음은 관객에게 이내 전염됐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내 딸이 울고, 내가 울고, 다시 어머니가 우셨다. 어머니, 나, 그리고 연수로 이어지는 '어머니와 딸'의 대이음에서 우리는 하나였다.
그러나 우린 역시 어쩔 수 없는 엄마와 딸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분장을 지우고 산울림 소극장 위층에 있는 카페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슬쩍 한 마디 핀잔을 던지셨다. "얘, 아무리 무대라지만 그렇게 옷을 훌러덩 벗어 내린 채 오줌 누고, 똥 누는 게 창피하지도 않니?"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