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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세모 유감

입력
200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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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은 몰랐다. 올 1월 새해를 시작할 때만 해도 희망은 있었다. 참여정부가 내세운 장밋빛 전망을 다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했었다. 지역과 학벌, 당파적 차별의 역경을 딛고 정상에 오른 젊은 대통령의 리더십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쾌도난마식 해결은 아니더라도 산적한 현안들을 하나 둘씩 차근차근 풀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다소 미숙하더라도 패기에 찬 젊음이 노련미만 강조하는 무기력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하지만 한 해를 마치면서 펼쳐 든 성적표는 참담하기만 하다. 대한민국은 분쟁과 갈등과 대립으로 1년 내내 멈춰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화물연대의 운송거부로 시작된 연쇄 파업이 첫 조짐이었다. 봄에 시작된 춘투는 여름까지 이어져 하투(夏鬪)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외국인들은 한국을 '동북아 파업 중심'으로 기억한다는 씁쓸한 우스개마저 떠돌아 다녔다. 서울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불붙은 집값 폭등은 서민들에게 위화감과 허탈감만 안겨주었다. 정부의 오락가락 대응으로 경인운하, 새만금사업,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문제는 아직도 표류 중이다.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방안에 처 박혀 있고, 신용불량자수는 사상 최대인 360만 명을 넘어섰다. 경제활동 인구 7명 중 1명이 신용불량자의 멍에를 뒤집어 썼다. 지난 해만 해도 넘치는 이익을 주체하지 못하던 신용카드 업계 1위 LG카드가 채권단 관리로 넘어갔다. 카드업계는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휘말려 '카드대란'을 겪고 있다.

대통령은 잦은 말 실수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더니 급기야 "대통령 못 해 먹겠다"는 말을 꺼냈다. 취임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재신임을 묻겠단다. 며칠 전에는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세모의 끝에서 국민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분하기도 하다. 기껏 뽑아 놓은 대통령이 툭하면 "못해 먹겠다" "그만 두겠다"고 투정하고, 국민들이 오히려 "참고 잘 해 보라"고 달래야 하는 이상한 상황에 처해 있다. 망년회 모임서 만난 친구는 "어려운 수학 문제 풀다가 잘 안 되니까 학교 그만두겠다고 떼 쓰는 아이를 달래는 부모 심정이 이럴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만 둘 각오가 돼 있다면 그 말을 입에 담기보다 마음에 새기고 주어진 일에 더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그 친구의 지적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이틀 후면 새해를 맞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얼굴에도 표정이 없다. 풍성한 세밑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지만 직장인이나 사업하는 사람들의 어깨는 삶의 고단한 무게로 처져 있다. 명예퇴직과 구조조정의 칼 바람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직장인들은 두툼한 보너스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5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보다 더 심한 불황이라는 상인들의 불평과 한숨에서 가는 한 해의 스산함이 묻어난다. 조류독감과 광우병으로 육류파동이 겹치면서 올 해 연말은 이래저래 더 뒤숭숭하다.

내년은 올 해 보다 나은 한 해가 될까.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저문 강에 삽을 씻으며 슬픔도 퍼다 버리고' 다시 희망을 얘기해야 할 세모다.

이 창 민 경제부 부장대우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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