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 가는 계미년, 또 한해를 보내며 문득 고향에 있는 친구가 그리워진다. 전화를 걸었다. 감이 멀다. 너무 가늘어 간신히 가슴에 닿는 것 같은 "여보세요!"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러나 언제 들어도 반갑기만 하다. "어떻게 지내냐, 식사는 잘 하느냐, 기운은 좀 어떠냐?" 그 동안 궁금했던 친구의 건강을 물어본다. "밥 많이 먹었다, 기운도 전보다 좋아져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동네 뒷산에 다녀왔다"는 대답이 나를 안심시킨다.내게는 고향에서 함께 자란 동갑내기 죽마고우가 일곱 명이 있다. 그러나 환갑을 못 넘긴 나이인데도 벌써 친구를 저 세상에 두 명이나 보냈다. 그런 터에 그 친구의 위암 발병 소식을 들으니 내 맘이 어떠했으랴.
그는 군에서 제대한 직후부터 줄곧 발바닥이 부르터가며 논두렁, 밭두렁 길을 다니며 농가를 방문, 한우, 양돈 등의 가축 사육 기술지도를 위해 평생을 몸바쳐온 농촌행정의 일꾼이었다. 그러다 두 해전 공무원 생활을 명퇴했다. 직장에 다닐 때 받고 싶었지만 퇴직금 문제도 있고 해서 미뤄 왔던 건강 검진을 퇴직을 앞두고 받았는데 위암 3기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고향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며 칭송이 자자했기에 그의 위암 소식은 온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난 해 내가 고향을 찾았을 때 허리가 활처럼 굽으신 노모께서 행여 자식이 먼저 가는, 못 볼일을 볼까 통곡하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 그는 그렇게 먼저 가게 되었지만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연금을 신청했단다. 그리곤 "지금 세상에 위암이 뭐 별다른 병이냐, 의학 기술이 발달해 다들 잘 낫는 병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크고 좋은 병원에서 치료 받으니 틀림없이 잘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노모를 안심시켰다.
가족들에게 얼버무리는 것을 수상히 여긴 부인이 병원으로 달려가 사실을 확인하고 곧장 서울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했다고 한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그 친구는 한 달에 한번 서울에 올라와 치료를 받다가 이제는 3개월에 한번 올라와 검사만 받는다고 한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는 부부의 위대한 사랑의 힘을 느끼며 가슴이 뭉클해 진다. 그리곤 무엇보다 나이 들어 살아가는 힘은 부부 사랑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되뇌어 본다. 저녁 늦은 퇴근길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들고 가는 발걸음이 전에 없이 가볍다.
/이대규·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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