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음력 2월 말, 동헌에 있던 곤양군수 이병의에게 한 통의 비밀 훈령이 경상 감영으로부터 전달됐다. '지금 경상도 산청군 생림리 압동에서 사망한 김씨 부인의 시신을 이미 두 번이나 검시하여 처결한 지 수 개월이 지났는데도 그녀의 아버지가 두 번의 검험 결과가 잘못이라며 누차 고소하였다. 원통한 죽음은 이미 조사가 완결되었다고 해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으므로 확실히 조사한 후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라.' 명령을 받은 이병의는 현장에 도착해 으레 그랬듯 고발자인 김씨 부인의 아버지를 심문했다. 호패를 확인해 보니 친아버지가 확실했다.'제 딸을 수 년 전 권원중에게 출가시켰는데 사위 권원중은 허송세월이 습관이 돼 노름 빚을 많이 지고 매번 빚 독촉을 받았습니다. 장인으로서 사람을 버려둘 수가 없어 지난해 봄 딸 편에 스물 댓 냥을 보낸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또 다시 몇 백 냥의 도박 빚을 다시 졌는지 권씨 친인척들이 제 딸에게 몸을 팔거나 쌀을 팔아서라도 남편 빚을 갚아주라며 핍박하고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구타하였습니다. 딸이 와서 이런 사연을 말하므로 제가 도리로써 타이르고 집에서 심부름하던 아이를 시켜 시댁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권씨 일가가 제게 와서는 딸의 병세가 급하다고 하므로 곧바로 가 보았더니 동네 사람들이 권씨들을 붙잡아 묶어 두는 등 창황한 광경이었습니다. 제가 놀라 곧바로 딸의 방에 들어가니 딸은 이미 죽어 있었고 사체는 싸늘했습니다. 입고 있는 옷에 흙 묻은 신발 자국이 곳곳에 찍혀 있었고 옷장이 깨져 있어 죽은 이유를 여러 권씨들에게 물었더니 혹자는 목을 맸다고 하고, 혹자는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체를 살펴보니 가슴 부위에 구타 당한 상처가 있고 시체 옆에 방망이가 하나 있기에 다시 내 딸이 어디에서 목을 매었느냐고 묻자, 마을의 집강(執綱) 조지순은 대밭에서 목을 맸다고 하고, 김상서는 측간 서까래라 하고, 시어머니 이씨는 방안 대들보라고 하니 한번 목을 매는데 장소가 세 곳이라는 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이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권씨의친인척으로 한 마을에 살면서 한 마음으로 대답하니 딸의 원한을 풀 길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권씨들의 호세(豪勢) 때문이옵니다.'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실마리는 역시 권씨의 먼 친척인 정환구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는 나이 오십의 중늙은이였는데 자식을 하나 얻으려다가 이번 사건 도중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저는 권원중과 이웃하고 살지만 별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11월 초 권원중의 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자세히 들어보니 그의 처 김씨가 목을 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늦은 밤인 데다 출가한 여동생이 저의 집에 와서 해산(解産)을 하는지라 풍속에 구애돼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가 이튿날 절린(切隣·이웃의 도리를 다하지 않음)의 이유로 붙잡혀 20여 일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잠시 석방돼 귀가하니 제 아내가 임신 8개월에 이런 변고를 당해 놀란 나머지 사산(死産)하고 앓아 누웠다가 곧 죽고 말았습니다. 집안이 완전히 망하여 도무지 정신이 없는지라 망연자실해서 앉아 있는데 노비 수월이가 저를 보더니 측은한 마음이 생겨 그랬는지 조용히 말하길, 죄는 다른 사람이 지고 액화(厄禍)는 당신이 받았으니 이 어찌 참혹하지 않은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유를 캐물었더니 11월 초 물을 길러 권원중의 집 창 밖을 지나가다가 부부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니 권원중이 처 김씨의 머리채를 붙들고 발로 밟아 거의 사경에 이른 것을 다시 끈으로 목을 감아 헛간에 매달았다가 조금 후에 방안으로 옮겨놓고 '목을 맸다'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자신 비록 목격은 하였으나 발설하지는 못했다는 답이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권원중이야말로 제 업보입니다.'
이병의는 정환구의 진술에 놀랐다. 수월이의 귀띔과 정환구의 진술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과 같았기 때문이다. 수월이를 대령하도록 했다. 그녀는 정환구의 진술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광경이 떠오르는지 온 몸을 부르르 떨던 그녀는 회상하기조차 싫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며느리의 죽음을 목격했을 시어머니 이씨의 증언을 듣고 사건을 마무리할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씨는 완강했다. 수월이가 거짓을 늘어 놓는다는 주장이었다. 이씨와 수월이의 대질 심문이 필요했다. 먼저 수월이는 이씨를 향해 물었다. 그날 밤 댁의 아들이 자부를 손과 발로 구타하고 거의 절명하자 다시 끈으로 목을 매어 헛간에 매달았다가 조금 후에 방안으로 옮기고 이불을 덮은 후 이 모든 일을 발설치 말라고 나한테 부탁하지 않았느냐고. 이에 시어머니 이씨는 수월이를 향해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이년아 네가 죽어도 그런 말을 지껄이느냐? 네가 어찌 이같이 말할 수 있느냐."
고문과 허위 자백
조사를 마치고 곤양으로 돌아온 삼검관(三檢官) 이병의는 초검, 복검 때 적당히 조사하여 살인 사건임을 밝히지 못한 이전 조사와는 전혀 다른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검시 때 보았던 김씨 부인의 사체에 구타의 흔적이 있었던 데다 수월이가 구타 상황을 목격했다고 진술하지 않았던가. 사체의 두 손은 약간 쥐고 있을 뿐 주먹을 꽉 쥐고 있지 않았고 혀 또한 나오지 않았으며 의복에 흙이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구타당해 죽은 후 자살로 위장된 것이 분명했다. 아래턱과 귀 부위의 줄 자국이 문제였지만 이 역시 목을 맬 때 숨이 남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증수무원록언해'의 '늑사조'(勒死條)에 죽기 전에 목을 조르고 자액(自縊)으로 위장하면 분간하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이번 사건을 일컫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산청군 생림리 압동은 권씨들의 세거지로 모든 관련인들이 권씨가 아니면 권씨의 척족이라 아무리 철저하게 따져 물어도 입을 맞추어 답변하는 것이 조사를 어렵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하늘이 수월이의 입을 빌어 김씨 부인의 원수를 갚도록 하지 않았는가. 조사가 마음먹은 만큼 쉽진 않았지만 이병의는 진실을 파헤친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산청에서 돌아온 지 그럭저럭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산청군에서 소식이 날아들었다. 수감 중이던 시어머니 이씨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4차 조사관이 산청군에 도달할 것이고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하던 그녀의 위증(僞證)이 세상에 탄로날 것인데 어찌 자살을 했단 말인가. 이병의를 더욱 불안케 한 것은 이씨 부인이 삼검관인 자신의 고문으로 토혈(吐血)하던 중 원통하여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었다. 심지어 삼검관이 심리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는 말까지 떠돌기 시작했다.
결국 4차, 5차의 추가 조사과정에서 곤양 군수 이병의의 고문은 결정적 문제로 부각됐다. 그가 공을 세우기 위해 심한 고문으로 수월이의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는 비판이었다. 수월이는 4검, 5검관 앞에서 3차 조사 당시 곤양의 사령배들이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고문을 가한 후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남편의 살해 광경을 보았노라고 진술하도록 협박했다고 폭로했다. 심지어 당시 얼마나 고문을 했던지 자신이 범인이라고 말하라면 그리했을 정도였다고 밝혔다.
5차 조사관은 혹형을 가해 받아낸 수월이의 진술을 허위 자백으로 규정하고, 사망한 김씨부인의 아버지 김영팔이 주장하는 타살 의혹 역시 남편의 도박 빚을 의논하던 딸을 시댁으로 돌려보낸 자신의 매정함에 대한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피하려는 무고(誣告)로 결론지었다. 시신에서 구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자진(自盡)이 확실하다는 보고였다.
글 김 호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군수 5명도 못밝힌 100년전 사건 미궁속 진실 규명은 역사가의 몫
100년 전 산청군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1902년 11월 산청군 압동에서 김씨 부인의 목 졸린 사체가 발견되었다. 산청군수의 1차 조사로 시작된 김씨 부인의 사건은 자살에서 타살로 그리고 다시 타살에서 자살로 반전을 거듭한다. 뿐만 아니라 그 사이 중요한 증인인 시어머니 이씨가 사망하는 극적인 상황도 발생하였다.
흔히 역사가는 탐정에 비유되곤 한다.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탐정과 사료의 편린을 발판으로 과거의 진실에 다가서려는 역사가의 행위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김씨 부인의 죽음을 둘러싼 보고서는 다섯 건이나 된다. 그리고 시어머니 이씨의 죽음에 대한 두 건의 보고서도 남아 있다. 이들 자료가 당시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100년 전 사건을 조사했던 다섯 명의 군수들조차 명백하게 밝혀내지 못한 김씨 부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 이를 밝혀내는 일은 이제 역사가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과연 현존하는 고문서들이 과거의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을까? 도대체 '역사적 진실'이란 무엇일까? 몇 년 전 산청군 압동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오리 모양의 개울을 보고 왜 그곳이 압동인지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당시 압동을 둘러보며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던 그곳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날을 기대한 적이 있었다. 이미 100년 전부터 '자신들의 진실'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산청군 압동, 그들만의 세상을 말이다.
연재를 마치며
과거에는 역사가들이 단지 '왕의 위대한 업적들'만 알고 싶어 한다고 비난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실하다. 역사가들은 점점 더 앞서간 사람들이 침묵으로 넘겨버리거나 배제하거나 또는 단순히 무시해버렸던 것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진즈부르그, '치즈와 구더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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