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 심정은 홀애비가 안다지만, 서말 구슬도 꿰어야 보배이듯, 우선은 상대가 있고 만나야 만리장성이 됐든 모래성이 됐든 쌓을 수 있는 일이다. 해서, 홀애비와 과부의 연은 그다지 기일 일도, 부적절할 일도 없는 것이어서 마을에서도 은근히 성원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노총각의 사정이고 보면 사정은 딱해진다. 동지 섣달 긴긴 밤의 질긴 설움이 과부나 노처녀들의 전유물은 아니니, 찾고자 든다면 남정네라고 허벅지 찌르는 사연이 왜 없었으랴만 문사들의 숱한 위문들은 이런 저런 까닭으로 아녀자로만 향했다. 으레 노총각 사연은 '오죽했으면'으로 귀결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시대는 이미, 삼종지도 따위의 허위 이데올로기로 강제되거나 덮였던 가면을 벗어 젖힌 지 오래. 인연도 사랑도 자웅 수급의 보편환경과 개개인의 경쟁력에 철저히 종속되는 바, 노총각 많은 울릉도의 아픔도 매정하게 따지고 들면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겠다. 하지만 연유를 따져 근원처방을 찾자는 것은 노총각 사정 모르는 한가한 소리. 해서, 울릉군이 팔을 걷어 부쳤다는 것이다.
바다를 두르고 사는 섬마을 어디나 그렇듯이, 울릉도 120년 개척사에서 남성의 존재는 늘 우람했다. "한 마을에 라디오 한 대 있을 동 말 동 했으니, 일기예보가 어데 있노? 그냥 하늘보고 나가는 기지." 심해선 바깥에 엎어 둔 종지모양 앉은 울릉도에서, 그렇게 배타고 나갔다가 못 들어오는 사정이야 다반사였다.
생계를 걸고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웅성(雄性)의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여성 과반의 사회사는 필연적이었고, '육지손님 어서 와서 나를 데려가라(가요 '울릉도 트위스트')'던 숫저운 섬 처녀의 하소연도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었다는 데, 오징어 말리던 배경조(71) 할아버지는 "홀애비, 총각을 불문하고 남자라면 골라가며 짝을 찾던 시절이었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판세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은 군 인구 감소와 궤를 같이 하는데, '잘살아보세'와 '무역 역군'이 유행어처럼 되던 70년대 어름일 것이라는 게 울릉문화원 이우종(66) 원장의 추론이다. "나고 드는 물길이 좋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일손이 남아도는 처녀들이 구미공단이다 어디다 하며 바람이 든 거요." 5톤짜리 오징어 배 한 척에 장정 10명이 달라붙던 시절도 자동조상기가 들어오면서 두 사람 노동력이면 넉넉해지고 보니 남자의 세월 서서히 멈췄고, 섬을 떠나는 이들이 늘어났다.
섬사람 특유의 교육열도 섬 공동화에 한 몫 해서, 똘똘하다 싶으면 초등학교를 마치자 마자 뭍으로 내보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까닭으로 60년대 말 3만명을 넘나들던 섬 인구는 현재 9,200명 남짓으로 줄었고, 그나마 급속히 노령화하는 추세. 이 원장은 "전국 지자체 가운데 인구 대비 유권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울릉군"이라고 했다. 그렇게 떠난 여자들은 뭍에서 만난 총각들과 결혼해서 정착한 반면, 남자들은 IMF(국제통화기금)사태를 겪으면서 고향으로 찾아 들게 된다.
사귀던 여자가 있어도 '울릉도 가서 살자'고 하면 고개를 쩔쩔 흔들더라는 것이다. "그 때 먼저 식부터 올리고, 울릉도 얘기를 꺼냈으모 됐을 낀데 말입니더." 부산서 직장생활 하다 몇 년 전에 섬으로 귀향한 장모(32)씨. 그는 농담하듯 웃음을 흘렸지만, 초점 없이 바다를 응시하던 눈빛만은 사뭇 진지했다. 울릉군 유일의 고등학교인 울릉종합고등학교 동창(90년 졸업) 180여명 가운데 남자는 셋 가운데 하나 여자는 다섯 가운데 한 명쯤 섬에 남았고, 그 중 남자는 장가간 친구가 거의 없고, 여자는 시집 안간 친구는 거의 없단다.
"일단 육지 물을 먹고 나모 엔간해서는 섬에 안 살라쿱니더. 여자는 특히 더하더마." 공무원 김모(35)씨의 자학조 한탄에, 동병의 연애사 한 자락씩은 품었을 이들이 동조하고 나선다.
―극장이 있십니꺼, 볼링장이 있십니꺼. 영화 함 볼라 캐도 교통비가 10만원 돈이고, 그나마 피서철 끝나모 배가 없어서 1박2일 코스 아입니꺼.
―아∼들 크모 육지에서 공부시키야 되지요. 불안해서 마누라 딸려 보내모 방학이나 해야 만나니 주말부부가 아이라 반기부부가 안 됩니꺼.
―공장이 있나, 사무실이 있나. 섬에서 여자들 일이라 캐봐야 나물 캐고, 오징어 배 따서 말리는 기 전분데 요새 여자들이 그거 할라 카나.
군이 추경예산까지 편성해가며 최근 결혼정보업체 '듀오'와 노총각 장가보내기 사업 계약을 맺은 것도 그 때문이다. 너나 없이 나가고 싶어 하지만 일단 장가를 들이면 생활이 안정되겠고, 머무는 인구가 많아지면 섬의 정주 여건도 좋아지겠기 때문이다. 첫 해는 군청 미혼 남자 직원 51명 가운데 위로 43살까지 사정이 급한 11명이 대상자. 당사자 쌍방의 프로필과 자기소개서, 사진 등을 교환한 뒤, 각개약진해 인연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군에서는 미팅 계획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육지 출장을 보내 적극 후원할 방침을 세우고, 성과가 있으면 일반 군민, 공무원 할 것 없이 대상을 확대한다는 구상. 듀오 대구지사장 박장윤(33)씨는 "만남의 기회를 최대한 늘리고, 좋은 결과가 있도록 매니저들로 하여금 충분한 설득작업을 병행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노총각들의 사설은 이어진다.
―그러니 '공무원' 카모 끄덕끄덕 하다가도 '섬'카모 고개를 외로 꼰다 아이가.
―그래도 '울릉도' 아입니꺼. 와서 보모 홀딱 반할 여자들도 많을 낍니더.
―맞다. 이런 물 이런 공기가 어데 있노. 고개만 돌리모 산이고 바다고 모두 그림 아이가. 모두 우리 하기 나름이다.
―내년에는 마, 합동결혼식 하입시더.
과연, 그림 같은 울릉도의 철 지난 바다는 시리고 맑은 물빛으로 쉼 없이 울렁거렸고, 무뚝뚝한 경상도 섬 총각들의 가슴도 너나없이 그렇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울릉=글·사진 최윤필기자walden@hk.co.kr
"5,000톤 여객선·경비행기 취항 멀지않아요"
60년대 이래 30여년간 울릉군의 군정 지침은 '파도를 막자, 길을 뚫자'였다고 한다. 바다에 갇힌 '닫힌 세상'일 망정 자족의 터전이라도 마련하자는 의미인데, 어느덧 56.5㎞ 섬 둘레는 4.4㎞(내수전―섬목)을 제외하고 일주도로가 났다.
이제 울릉군의 구호는 '섬을 육지로, 육지를 섬으로'가 어울린다. 육지를 잇는 '길'을 닦자는 것이다. 여름·가을 태풍에, 겨울 계절풍에 1년이면 100∼120일씩 끊기는 바닷길을 넓히고, 하늘길을 새로 놓자는 것이다.
사동의 울릉항(사진)이 2006년 완공(예정)되면 기존의 2,370톤급 여객선이 아니라 5,000톤급의 취항이 가능하고, 그러면 폭풍경보만 아니면 배가 뜬다고 한다. 2001년 건설교통부가 타당성 조사를 끝낸 경비행기 취항(북면 천부리)도 2010년을 목표로 계획이 섰다. 늦어도 2005년에는 실시설계 용역을 시작해야 하는데 차일피일 예산 편성을 미루는 정부 처사에 울릉군민들은 피가 밭는다고 했다. 군은 내년 국책사업정책기획단을 꾸려, 해양심층수 개발사업과 함께 경비행장 유치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섬의 애환이란 육지와의 소통난이다. 뒤집어 보면 울릉도 최대의 자산인 태고의 순수도 섬 사람 닫힌 생활의 인고를 수반한 것인데, 이제는 문을 열어달라는 게 주민들의 생각이다. 문을 열어야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살아야 섬을 지켜도 지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변했고, 울릉도의 세월도 그 변화에 순응해야 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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