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프랑스 거리 곳곳에 알전구가 매달린다. 그러나 막상 크리스마스 이브에 불빛 찬란한 샹젤리제를 누비는 이들은 대부분 관광객이다. 아무리 치장해도 관심을 끌지 못하기는 TV도 마찬가지다. 성탄절은 가족과, 31일은 친구들과 보내는 전통 때문이다.프랑스 TV도 송년 프로그램을 내보낸다. 서커스, 영화, NG모음, 크레이지호스쇼나 리도쇼 등이 단골 메뉴지만 별로 건질 게 없다. 대부분이 노인인, 가족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허술한 아파트에서 벌거벗은 무희들을 구경하며 새해를 맞는다니, 마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전문채널 파리프르미에르에서 방송되는 '포부르 셍토노레 93번지'의 송년 편성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올 가을 신설된 이 프로그램은 컨셉부터가 새롭다. 인기 진행자 티에리 아르디송이 그의 집에 손님들을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며 담소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포부르 셍토노레는 뉴욕으로 치면 5번가 같은 곳. 비싼 상점과 고급 아파트가 즐비한 이 거리의 5층, 천장 높은 40평형 옛날 아파트에서 열리는 만찬에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초대된다. 문인 막스 걀로,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 전 공영채널 사장 미셸 코테, 개그맨 엘리 세문,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 영화인 미셸 세로, 가톨릭 수사 모랑데…. 다양한 분야에서 초대된 예닐곱 명의 손님들은 매회 하나의 색깔을 배경으로 시사, 문화 현안을 토론한다. 예를 들어 '적색 만찬'에는 흑장밋빛 식탁보에 토마토 수프, 산딸기 소스의 간요리, 체리 샤베트가 조화를 이루고, 손님들은 붉은 등 아래 철쭉빛 잔에 담긴 적포도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넥타이를 늦추고 주고받는 진솔하고 재기 넘치는 대화에 꽁꽁 숨겨둔 속내가 묻어나오고, 논쟁이 벌어지고, 뒷얘기가 들춰지기도 한다.
시청자를 의식한 인사말도 맺음말도 없다. 집안 곳곳에 설치된 10대의 원격조종 카메라가 잡아낸 서너 시간 분량의 영상을 전채요리 본식 후식 등 풀코스 식사 순서로 60분 길이로 편집한 것이 전부다. 그렇다고 몰래 카메라의 무례함을 연상해서는 곤란하다. 시청자들은 남의 저녁상을 구경하는 재미보다는 그 식탁에 함께 앉아있는 듯한 동질감에 후한 점수를 준다. 이는 '클로드 소테의 영화 장면을 연출하고자 한다'는 기획의도가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주 1회 방송되던 '포부르…'가 연말을 맞아 매일 저녁 특집 편성되어 특히 반갑다. 연말을 혼자 보내야 하는 시청자가 처량한 부조리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오소영·프랑스 그르노블3대학 커뮤니케이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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