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 12월29일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가 살해됐다. 52세였다. 캔터베리 대성당을 피로 물들이며 이 나라의 종교적 최고지도자를 난자한 사람들은 국왕 헨리2세의 사주를 받은 4인의 기사였다. 이로써 대주교와 국왕 사이의 해묵은 대립은 국왕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토머스 베케트와 헨리2세의 사이가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둘은 가까운 친구였다. 헨리2세는 토머스 베케트를 대법관으로 임명해 내정 개혁을 맡겼고, 마침내 영국의 정신적 최고 지도자라 할 캔터베리 대주교로 뽑았다. 그러나 헨리2세가 교회의 재판권을 제한하는 클래런던법을 공포한 뒤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토머스 베케트는 이 법에 반대해 교회의 재판권을 옹호했고, 더 나아가 교황 알렉산더3세를 등에 업고 국왕과 가까운 주교들을 파문했다. 마침내 헨리2세는 적어도 잉글랜드에서는 자신의 세속 권력이 교회 권력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토머스 베케트의 암살이 헨리2세의 궁극적 승리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교황의 명령에 따라 헨리2세는 이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고해를 하는 데서 더 나아가 클래런던법을 폐지해야만 했다. 토머스 베케트는 살해된 지 세 해 만에 시성(諡聖)되었고, 그 때부터 영국 국교회가 확립되기까지 수백년간 가톨릭 신자들은 그의 유골함이 안치된 캔터베리 묘당을 중요한 성지(聖地)로 순례했다. 중세 영국 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1387∼1400)는 토머스 베케트의 묘에 참배하러 온 사회 각층의 순례자들이 런던의 한 여관에서 돌아가며 이야기하는 운문 설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토머스 베케트의 암살은 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의 2막 시극 '성당의 살인'(1935)을 포함해 몇몇 연극·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고종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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