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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주]<26> 나의 짐, 나의 기쁨 꽃봉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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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주]<26> 나의 짐, 나의 기쁨 꽃봉지회

입력
2003.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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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참 상복이 많은 사람이다. 백상예술대상을 두 번이나 탔고 동아 연극상, 이해랑 연극상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죽을 때까지 아무리 기를 써도 받을 수 없는 상이 있다. 꽃봉지회가 주는 '올해의배우상'이 그것이다. 꽃씨를 담아 그 아름다운 향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뜻의 이름을 지닌 이 모임은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단체로서 나의팬 클럽이기도 하다. 국내 연극 배우 팬클럽 1호인 꽃봉지회는 회비로 상금을 마련해서 매년 가장 돋보이는 배우 한 사람에게만 '올해의배우상'을 주고 있다.올해로 일곱 번째인 이 상을 윤석화, 장민호, 백성희, 손숙, 권성덕, 김금지, 박지일 등 연극계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받았다. 회칙상 나는 절대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래도 꽃봉지회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 그 행복의 씨앗은 연극 배우가 지닌 숙명적 비극에서 비롯했다. 아이러니도 이만 저만한 아이러니가 아닌 셈이다.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극장에 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처럼 규모가 큰 즐거움을 주는 것도, 하루 5회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연극에 '장기공연'이 있었던 건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 보름이 고작이었다. 그 짧은 기간에 투입한 제작비를 뽑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구조 속에서 나는 연극으로 돈을 번다는 것을 한번도 실감할 수 없었다. '개런티'란말은 나와는 무관했다. 극단에서도 '거마비'라고 낮추어 표현한다. 거북해서? 아니면 난처해서? 하긴 모든 물가가 치솟아도 배우의 '거마비'는오르는 법이 없으니까.

90년 '대머리 여가수' 공연으로 내가 받은 개런티는 50만원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연극배우는 사람인가'하는 의문이 그때 생겼다. 히스테리를 느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굴욕스러웠다. 그리고 더 이상 연극을 해야 할 이유를 그때 잃었다. 그래, 나는 언제나 늦되었지, 연극만 30년 가까이 해왔으니 그 많은 시간과 열정을 다른 데 투자했더라면 내가 아무리 멍청이라도 지금보다는 부자가 됐을 텐데. 그렇게 한심하게 자조하며.

그래도 나는 연극표를 팔았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중년 여자들의 소극성, 나이가 주는 권태를 나는 안다. 그들을 부르고 싶었다. 나의 분투를 본 둘째 언니와 친구들이 표를 사주기 시작했다. 주변에도 권하며. 연극배우 박정자를 후원하는 모임. '꽃봉지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91년이었다. 우선 17명의 회원이 생겼고 다시 150명으로 늘었다. 이제는 300명으로 불어난 꽃봉지회 회원 중에는 전문직을 가진 사람도 있고 주부도 있다. 정치인, 언론인, 문화계 인사, 일반 직장인 등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연극 배우 박정자라는 하나의 코드로 한 데 묶였다. 그들은 공연 때마다 극장에 와서 내 무대를 지켜보며 연극이라는 하나의 진실에 참여한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나는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누가 연극을 와서 봐주기나 할까. 미리 불안하고 미리 허무하던 나는 고정 관객이 생긴 것이, 아무 공덕도 없이 그들을 갖게 된 것이 진정 기뻤다. 꽃봉지회 회비로 회원들에게 표를 보낼 때는 나만 아는 기쁨을 감추기 힘들었다. 언제나 나는 표를 보낼 대상이 없어서 막연했었으니까. 연극을 해야 하는 이유, 무대를 떠날 수 없는 이유, 다시 잃어버렸던 그 이유를 꽃봉지회를 통해서 다시 찾고 있다. 그저 모골이 송연할 만큼의 긴장, 게으름 피울 수 없다는 투정, 연극배우로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짐이 있을 뿐이다. 나의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이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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