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부패감시 국제민간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03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133개국 가운데 50위를 차지하였다. 굳이 이런 순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의 부정부패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며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데엔 모든 국민이 동의하고 있다.그러나 그러한 국민적 동의가 과연 실천으로 연결되고 있는가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국민의 일상적 삶에 만연돼 있는 생활형 부정부패는 정치권의 부정부패보다 더 은밀하고 끈질긴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내부 고발'이 없이는 척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내부 고발'엔 만만치 않은 문화적 장벽이 버티고 있다. 기업의 내부 고발자에 대해 노조마저 외면한 사례들이 있고 내부 고발로 인해 '왕따'를 당한 사람이 가정 파탄까지 맞으면서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 내부고발 활성화엔 제도 개혁만으론 돌파하기 어려운 문화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요즘 부정부패 문제와 관련해 이탈리아의 '마니풀리테'가 자주 거론되고 있지만, 그런 혁명적인 부패추방운동마저도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라고 하는 이탈리아 특유의 문화적 장벽만큼은 넘어서질 못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정부패는 가족주의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가족주의가 매우 약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국제투명성기구의 청렴도 순위에서 상위권을 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은 이탈리아 이상으로 '비도덕적 가족주의'가 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혈연관계를 넘어서 관료 조직에서 기업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직에 만연돼 있는 나라다. 그런 가족주의적 조직문화에서 내부고발은 '배신'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비도덕'은 '부도덕'과는 달리 아예 도덕적 판단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바로 잡는 게 매우 어렵다. 한국인들이 부정부패에 대해 묘한 2중 기준을 갖고 있는 것도 그런 '비도덕'의 산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부정부패는 세상을 슬기롭게 사는 처세술로 간주하면서 그걸 교정하려 들지 않는 반면, 그로 인한 무의식적 죄의식을 정치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맹렬한 비난과 저주로 해소하려 든다.
그런 2중성의 굴레를 벗어나 모든 영역에서 내부고발을 진작시키기 위해선 제도개혁과 더불어 의식개혁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언론이 해줘야 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 언론의 부정부패 보도의 틀은 크게 잘못돼 있다. '사건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평소에 뻔히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검찰과 경찰이 수사에 착수해 '사건'이 될 때에만 일순간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식 기사를 양산해낼 뿐 성실한 사전 및 후속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내부고발마저 그런 식으로 다루고 있다. 지난 11월 공직사회 부패를 고발한 40대 초반의 지방공무원이 부패방지위원회로부터 6,000만원이 넘는 신고보상금을 받자, 언론은 그 공무원이 '돈벼락'을 맞았다고 보도했으며, 일부 언론은 '돈벼락'이라는 단어를 기사 제목으로까지 내걸었다. 모든 기사의 초점은 '돈벼락'이었지, 내부고발만이 공직사회를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나 고민이 결코 아니었다. 부정부패는 단순한 사건이나 흥미 위주로만 다루기엔 너무도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라는 걸 잊지 말자.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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