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지구촌이 새로운 전염병들로 몸살을 앓은 가운데 최근에는 미국발 광우병 파동이 몰아치고 있다.사실 신종 전염병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30년 동안 새로 발견되거나 발생한 신종 전염병만 해도 에볼라 출혈열, 에이즈, 니파 바이러스 감염증, 헬리코박터 파이로리, 조류독감, 사스, 변형크로이츠펠트-야콥병(광우병) 등 25개가 넘는다. 여기에다 기존 항생제로 다스려질 것 같았던 세균들이 내성(耐性)이라는 반격에 나서 인류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결핵 등 없어질 줄 알았던 각종 전염병들도 다시 만연하고 있다.
여행과 교역의 확대로 요약되는 세계화와 개방화 속에 인구구조 및 행태의 변화, 환경파괴와 생태계의 변화, 병원체의 변화와 증가 등으로 인해 새로운 전염병은 앞으로도 계속 생겨나고, 기존의 전염병은 자체 변화를 하면서 인류를 위협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이런 상황에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다. 관건은 이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느냐 이다.
지난 10월 사스에 관한 심포지엄이 대한예방의학회 주최로 열린바 있다. 이 자리에서 한 원로교수가 "그나마 사스가 유행해서 다행"이라는 역설 아닌 역설을 하자 많은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에는 사스가 신종 전염병 치고는 치명률이 상대적으로 낮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뜻이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사스의 유행에 따른 대책과 대비과정에서 우리나라 전염병 관리체계의 많은 문제점들이 전면으로 노출되었고, 그동안 이의 개선을 요구했던 해묵은 주장들에 대해 정책결정자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다시 말해 더 심각한 신종 전염병이 찾아오기 전에 사스를 미리 경험함으로써 외양간을 수리할 기회를 가진 게 다행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전염병 대책에 있어, 국가의 기본 임무는 예방접종, 전염병 감시, 역학조사 및 방역사업, 검역, 보건교육 및 홍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국가의 기본 사업인 예방접종과 관련해 그 접종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전염병관리의 기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주요 전염병의 예방접종률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예방접종 관리체계의 혁신적 개선이 시급한 것이다.
전염병 감시 역시 좀처럼 개선이 안 되고 있는 고질적인 문젯거리다. 우리나라의 법정 전염병 신고율은 실제 발생의 10∼40% 밖에 안되며, 표본감시의 정확도는 국제회의에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다. 다행히 국립보건원에 담당과가 생기면서 감시체계의 평가, 감시결과의 환류작업들이 시작되기는 했으나, 발생률 등 통계지표 산출이나 유행의 조기발견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또 하나는 역학 전문인력의 문제다. 주요 전염병이 퍼질 때 현장에 파견되는 전문가인 역학조사관은 공중보건의사들이다. 신분상의 갈등과 밤낮없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이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지만, 각 시도에 역학 전문인력을 보강해 질병감시와 역학관련 업무를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전염병 환자관리에 있어서도, 예컨대 음압시설을 갖춘 격리병실은 전국적으로 손 꼽을 정도인데, 국가가 지원해서라도 제대로 된 격리병실을 늘려야 한다.
전염병 관리의 중요한 축은 대국민 교육과 홍보이다. 전염병예방에 중요한 손씻기와 같은 교육을 위한 표준교육안과 비디오 등의 교육자료들이 개발되고 보급되어야 한다. 이러한 부분들이 현재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전염병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정책담당자들이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질병관리본부의 발족, 전염병 감시체계의 평가, 각종 관련법규의 개선작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 튼튼한 '외양간'이 되도록 정부와 국민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천 병 철 고려대 교수·예방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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