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는 일을 두고 제가 굳이 선생님께 글을 쓰는 이유는 역사가 되어 가는 이 일을 해가 가기 전 저로서도 마무리하고 싶어서입니다. '수능 복수정답 결정과정'에 대한 논란의 시작이 인터넷에 익명으로 올린 선생님의 글과 이를 그대로 옮겨 실은 몇몇 신문보도 때문이었음을 안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선생님, 선생님은 대한민국 평가원과 해당학회가 단 한 사람의 영향력에 휘둘려 복수정답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온당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저의 '지인'을 검토위원에 포함시키라고 했더니 그 학회가 잘 알겠다며 제 요구를 따랐다는 것입니까? 저는 어느 학회가 누구를 왜 검토위원으로 선정했는지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나의 지인 한 사람만 5번이 답이라고 했다는 주장 역시 실상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공식회의 석상에서 "3번만을 답으로 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3명 뿐이었고, 그들은 출제자와 공동저서를 낸 그의 막역한 '지인'과 그 지인의 동문들이라는 사실을 저는 나중에 알게되었습니다. 나의 지인이 나와의 관계 때문에 문학평론가로서의 명성을 포기하고 오답을 정답이라고 왜곡했으리라 추정한다면, 같은 의혹을 그분들에게인들 둘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지금도 그 분들이 자신의 인격과 명예를 걸고 자기 소신을 밝혔으리라 믿습니다. 문학전공자를 중심으로 저희 대학에서 행한 설문조사에서는 답을 주신 교수님 대다수가 저와 동일한 견해를 밝혀주셨고 저는 그 자료를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문위원회의에 참고인으로 가게 된 것 역시, 학부형도 나설 수 있는 자리이니 문제제기자로서의 입장을 밝히라는 평가원측의 거듭된 요구 때문입니다. 출제위원 측이 3번이 정답인 이유를 소상하게 설명할 기회를 먼저 가진 뒤, 저는 자문위원들의 진정성과 공정성에만 기대어 44만 수험생을 생각하면서 고군분투했을 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5번 답의 설득력이 아니라면, 정답을 번복한다는 이 심각한 결정에 그 누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끌렸겠습니까? 3번을 지지한 분 중에는 번복결정의 버거움을 고려한 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 회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측의 성실한 의견 개진과 진지한 토론의 자리였습니다. 참석자 중 누구도 저의 영향력에 휘둘려야 할 이유가 없었으며, 저 또한 소신을 밝히되 평가원의 결론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바로 '페어플레이'였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언론에 학부형임을 밝혔다"고 하자, "언론이 폭로하니까 그제서야 변명한다"고 응수하는 수험생들, 대학 총장께 저의 징계를 요구했다는 그들의 부모들을 마음 속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느 날, 저는 선생님을 통해 제가 배우는 것이 바로 '인욕'(忍辱)임을 깨달았습니다.
법원은 평가원의 결정을 온당하다 판결하였고, 대학은 저의 사회적 행위의 동기가 '학자적 양심'이라는 것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이 반론을 싣게되는 과정에서도 저는 '인욕' 뒤에 값진 화해와 신뢰가 찾아들 수 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저와 선생님, 언론계, 교육계, 모두의 삶에 하나의 과정이었던 이 일이 우리 모두를 한 단계 고양된 자리로 이끌어가기를 기원하면서 새해 인사를 대신합니다.
최 권 행 서울대 교수불문학
편집자주: 수능 언어영역 복수정답 결정과정과 관련, 지난 11월 27, 28일자 본보 사회면 기사 및 사설을 읽고 필자가 보내온 반론이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싣는다. 본보 기사나 사설에 의해 필자의 사회적 행위의 내용과 동기가 오해되어 필자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면, 이는 본보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히며, 필자에게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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