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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커버스토리/ 편지

입력
2003.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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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겐 요즘 집 앞을 서성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군대 간 아들 녀석의 편지를 기다리는 것입 니다. 어젠 전기요금 고지서만 달랑 들고 온 집배원이 그렇게 야속하고 얄미울 수 없었습니다. 저 멀리 집배원이 보일라치면, 어머니 설레는 가슴은 오토바이 엔진보다 더 빠르고 크게 고동칩니다.찬바람 묻은 아들의 편지가 따스한 어머니 손에 들어옵니다. 봉투를 뜯으며 녀석의 얼굴을 떠 올립 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가슴으로 읽어 내려갑니다. 군데군데 얼룩이 묻은 편지지는 또 다시 어머니 의 뜨거운 눈물로 흐리게 번져갑니다.

편지는 설레이고 기다림입니다. 여기 빨간 우체통 하나 있습니다.

배달을 기다리는 여덟통의 편지가 집배원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딸은 세월에 밀려 쇠잔해진 아버지의 어깨를 예쁜 꽃편지로 감싸줍니다. 무뚝뚝한 평소와 달리 편지 속 자상한 말투에 아들은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도 보 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하얀색 규격봉투는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 중 차라리 읽지 않았더라면 한 편지가 있습니다. 남극 세종기지에서 꽃다운 청춘을 바친 고 전재 규 대원의 아버지가 쓴 편지입니다. 글자 하나 하나는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쓰여졌고, 문장 한 줄 한 줄은 굵은 눈물로 이어졌습니다. 편지 주인에게 전해주겠노라는 약속도 물론 지킬 수 없습니다.

보내지 않아도 해는 가고, 부르지 않아도 해는 옵니다. 그렇다고 의미 없이 세월의 매듭을 짓는 건 너무 허무합니다. 지금, 내 소중한 이에게 편지 한 통 쓰는 건 어떨까요? 남편의 편지는 어느새 반 성문이 되고, 아버지는 결국 딱딱한 훈계로 끝나고, 딸은 시종 감사와 사랑만 노래해도 상관없습니 다.

그 사람 생각하며 밤새 붓방아를 찧어 댑시다. 그 마음 또박또박 편지지에 옮깁시다. 그 편지 고이 접어 봉투에 넣읍시다. 그 위에 사랑의 징표 같은 우표 한 장 붙입시다. 그 사랑 집배원 손 거치는 동안 달콤하게 익어갈 것입니다. 자, 여기 당신을 위해 빨간 우체통 하나 준비해 두었습니다.

글 김일환기자 Kevin@hk.co.kr

사진 류호진기자 jsknight@hk.co.kr

■ 인생선배 아빠가…

정승규(47) 성균관대 의대 교수

정승규씨는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공계 홀대 현상'이 심학해지면서 이공계 대학 1학년인 아들의 방황을 안타깝게 여겨 인생의 선배로서 편지를 썼다.

유치원 때부터 중ㆍ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의 교양과정에서도 배우지 못했을 인생의 목표와 사회생활 그리고 결혼 이렇게 세 가지에 대해 인생선배로서 이야기해주고 싶구나.

인생의 최대목표가 마치 대학에 가기 위한 것처럼 공부를 시키는 것을 보니 대학이라는 중간 과정에 너무 집착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인생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대학에 가는 것, 직업을 갖는 것 그리고 돈을 버는 것도 자기가 이루고 싶은 목적을 위한 방편 또는 과정이지 목표는 아니란다. 인생의 목표란 자기가 살아가는 방향을 말하는 것이지. 방향 설정이 잘못되면 과정이 좋아도 잘못된 삶을 살 수 있단다. 아빠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이용하여 무언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었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사회는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장소이기에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중요한 만큼 남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단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 토의하는 방법 그리고 주장을 하는 방법 등을 좀더 자세히 배웠으면 한다. 대화를 할 때는 다시 한번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한다면 더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너도 이공계를 지원했지만 이공계를 지원하는 학생이 줄어든다고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이공계를 택한 사람은 자기의 전공 분야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지. 처음에는 자기의 지식만으로 일을 할 수 있지만 점점 전문지식 못지 않게 대인관계도 중요하단다.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과 함께 대인관계를 잘 풀어나간다면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반은 여성이란다. 남녀 평등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성차별이 있는 것 같구나. 남자와 여자는 표현방식과 사고에 다소의 차이가 있어 상대방의 표현 방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오해를 할 수도 있다고 하는 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면 이성의 언어 등의 생활 특성에 대하여 공부를 해 두는 것이 필요하단다. 서로 인생의 목표를 위하여 같이 돕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죽은 뒤 묘비에 어떤 사람으로 기술되는지 즉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생각하여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

■엄마… 가난해도 따뜻한 추억이 있잖아요

장세영양(광주효광중 3학년ㆍ2003년 삼성효행상 청소년상)

장세영양은 오른손이 절단된 1급 장애인이자 갑상선염을 앓는 어머니를 대신해 가사를 도맡아 왔다. 기초생 활수급으로 가정이 어려운 형편에도 원만한 교우관계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에서 밝고 명랑한 학생 으로 인정 받고 있다.

사랑하는 엄마께

엄마, 저 딸 세영이에요.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지금까지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왔고 얼마 전 큰 상까지 받고 해서 감사의 마음을 보여드리고자 이렇게 편지를 올립니다.

제가 광주로 처음 전학 왔을 때 생각나세요?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걱정할 때도, 성적 때문에 고민할 때도, 엄마는 아무 말씀 없이 그저 아침마다 밤마다 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어요. 지금까지 곁길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자랐다 소리 들을 수 있는 건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주위 분 들의 따뜻한 관심도 있겠지만, 엄마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올해 들어 엄마 갑상선염 때문에 시골에 내려가 계시느라 엄마와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한 것 같아 요. 그래도 가장 기억 나는 건, 오빠랑 저랑 엄마랑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김장을 담았던 거예요. 비록 몇 포기 담진 못했지만 배추에 간을 들이는 것부터 배추 속마다 양념을 버무리고 서로에게 찢 어서 먹여주는 것까지…. 나중에 제가 엄마가 되어서 김치를 담글 때마다 우리 가족끼리 김치를 담 그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릴 것 같아요.

요즘 엄마랑 떨어져 살아서 너무 속상할 때가 많아요. 이번에 2박3일 수련회를 갔다가 눈과 바람이 몰아치는 걸 보고 행여 엄마가 밖에 잠깐이라도 나갔다 넘어지실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그러니 까 아프지 마시고 빨리 건강해지세요. 그래야 같이 살면서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교회도 같이 가고 엄마도 저도 오빠도 쓸쓸하지 않고 항상 웃으면서 살 수 있지요.

얼마 전 있었던 삼성 효행상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어요. 우와! 시상식에서 느낀 게 참 많았어요. 엄마께 내색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저도 가끔 좀 ‘있는’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었어 요. 하지만 저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고 착하게 자란, 같은 또래 수상자들을 보면서 ‘ 아, 나는 지금껏 행복에 겨운 불평불만을 하고 살았구나’라고 반성했어요. 어떤 조건에서든 그저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하는데, 그 동안 저보다 괜찮은 조건의 사람들만 보고 어리 석은 생각을 했구나 하고요.

우리, 지금은 힘들어도 이렇게 주위의 도움으로 좋은 상도 받고,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하면 우리 가 정에도 해 뜰 날이 찾아올 거예요.

엄마의 기도 제목처럼 하나님께나 이 나라에게나 충성 된, 기둥 같은 일꾼으로 제게 주어질 사명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까 엄마는 건강하게 오래오래만 살아주세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의 귀한 보배 세영 올림

■동화의 섬나라에 사는 꼴찌아빠가…

새해에는 준수야

2000년 12월 31일, 너와 단 둘이서 특별한 새해를 맞이할 양으로 남이섬에 왔다가 아예 이곳에 눌러앉아 버린 지 꼭 3년째로구나. 네가 하룻밤만 자고 집으로 돌아간 후 엿새를 더 머물렀다. 그 때 쓴 남이섬 비망록, 오늘의 남이섬에서 다시 들추어 보니 감회가 새롭구나.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무며 풀이며 흙이며 내게 말하는 것 같다. ‘도와 줘’라고. 그래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남이자연은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나 만의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래, 내가 만져 줘야 해. 이것은 잠꼬대일까?

한데 나에게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무들에게, 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단지 마음 뿐이다. 그리고 몇 가지 얄팍한 치유법, (중략) 섬의 식물이며 곤충들이 겪는 아픔을 보노라면 자식의 병을 대신 앓고 싶어하는 어버이 마음과 같은 것인지 모를, 그런 감정이 솟아난다. 그래, 여긴 동화나라여야 해. 싸우고는 용서하고 금세 토라졌다가 다시 배시시 웃을 수 있는 그런 환상의 나라(후략)”

그리고 꼭 3년이 지났구나. 오늘의 남이섬, 사람들은 동화나라처럼 변해가고 있다고들 하지. 사실 특별히 변한 건 없는데도…. 단지 변한 게 있다면 전봇대 뽑아버리고 흉한 천막들 걷어내고 길을 다듬은 것 뿐이야.

아, 또 있구나. 남이섬의 새 상품들. 처음엔 달밤과 별밤이 아름답다고, 그걸 팔았고, 다음엔 새벽의 물안개를 팔았어. 원가도 안 들고 최소한 한 사람당 5,000원씩은 받을 수 있었거든(그러다가 봉이 김선달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요즘은 외국인들이 더 많이 들어오더라. 그러다 보니 간판들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의 순으로 다시 배치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주로 동남아에서 오는 외국 손님들은 추위에 약하잖아?

그래서 요즘 새 상품을 또 만들었지. 뭔지 알아? 모닥불이야. 그들은 더우니까 모닥불을 거의 쓰지 않지만 추운 남이섬에서 얼마나 좋아 하겠니? 또 있구나, 고드름. 연못가에 가지치기한 나무들을 잔뜩 쌓아놓고 물을 뿌리니까 고드름이 얼마나 많이 열렸겠어? 다들 그 앞에서 신기하다고 사진 찍느라고 난리야. 재밌잖니?

‘아빤 도데체 몇 살이세요?’ 라고 가끔 물어오지만 난 지금 이 나이에도 이렇게 산단다. 재밌으니까. 하여간 준수야. 너도 이제 2학년이 되는구나. 작년에 네가 원하는 대학에 못가게 됐다고 재수하려 할 때, 나의 충고 들어준 것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대학이란 게 시작일 뿐, 시시한 고등학교에서도 꼴찌를 하던 나의 하찮은 경험에 귀 기울여 주고, 그게 네가 하루하루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에 난 놀라워 하고 있어. 어쨌건 넌 재수한 친구들 만큼 원하는 대학엔 못 갔지만 새해엔 2학년이 되쟎아? 2학년의 눈으로 보면 4학년이 가까이 보이고 이 사회와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기도 쉬울거야.

새해엔 준수야. 네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네 생각이 아버지의 틀 속에 머물지 않고, 너의 우주 만이 지닌 더 가치로운 세계가 있음을 자랑스러워 해 주기 바란다.

전공의 테두리 속에서 학업에만 의존하기 보다는 네 주변의 작은 일들에도 더 많은 눈을 돌릴 수 있는 자유로움이 너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새해가 되었으면 한다. 네가 생각하고 네가 판단해서 행할 수 있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남의 일을 걱정해 주기 전에 자신의 문제부터 먼저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네 도움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해.

나는 내 일에 더욱 열중할 거다. 네가 초등학교 때 나랑 만든 우리 만의 가훈, 생각나니? “너 강우현의 아들로서 아버지 쪽 팔리게 하지 않고, 나 강준수의 아버지로서 너 쪽 팔리게 안 할께.” 안녕.

아버지로부터 준수에게

■어머니… 당신은 제가 꿈꾸는 삶입니다

연세대 서문 앞 레스토랑 '마리아 칼라스(02_3142_4288)' 운영

양형윤(38)씨는 30여년간 스토리 퀼트를 만들어온 어머니 안홍선(65)씨를 위해 올해 4월 '안홍선 라이프 65' 전시를 기획했다. 11월에는 퀼트 작품을 모은 달력을 만들어 남다른 사랑을 과시하는가 하면 어머니의 글을 모은 시집도 준비중이다.

사랑하는 어머니….

항상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아무 이유없이 편지를 써 본 기억이 없어요.

어제 가게에는 잠시도 쉴 틈 없이 손님들이 몰려왔습니다. 벽에 걸려있는 어머니의 퀼트 작품에 대한 찬사와 감동이 가득했습니다. 순간 처음 가게를 오픈 했을 때, 어머니가 정성을 다하여 꾸며주시고 밤을 지새워가며 만드신 작품을 “너를 위하여…”라고 이름하셨던 것이 생각났어요. 세상의 어떤 딸이 그런 사랑을 받아 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어머니의 열정은 감동 그 자체였어요.

너무나 많은 작품을 하시느라 손가락이 마비되고, 그러면서도 쉬지않고 구상하시고…. 결국,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하고 가게를 오픈 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이세상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행복과 어머니의 사랑을 저는 가졌어요. 제 딴에는 그런 어머니를 널리 알린다고 전시회도 기획하고, 작품으로 캘린더와 노트 만드는 사업을 하다 보니 그것 역시 결국 저를 위한 일이 되어버렸네요.

어머니의 작품으로 계속 이렇게 일을 만들면서 항상 같이 있는 것 같아 전화도 자주 안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 때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는 엉터리 같은 딸이 되었어요. 전에 아버지가 “자식은 잘 기를수록 멀리 간다”고 하셨죠. 정말 정성을 쏟아 주실수록 왜 이리 바쁜지….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어하는 저를 잘 아시고 제 포부를 채워 주시려고 하시는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을 이 편지를 통하여 전해봅니다.

성실하고 착한 남편, 세 명의 아들, 하고싶은 일도 하고있고, 앞으로의 계획도 무궁무진하고,모든 주변 사람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이 세상의 어떤 딸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표현은 가장 부족한 딸이기에 항상 가슴 깊은 곳에는 죄송함이 있어요.

엄마.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한도 끝도 없이 사랑해요.

갑자기 옛일이 생각나네요. 제가 인천으로 시집간지 얼마 안 되어서 아파트 앞의 시장에 나갔다가 붕어빵을 사먹으면서 엄마한테 전화했던 기억.

“우리 동네에 붕어빵이 너무 맛있어요. 엄마 오시면 꼭 사 드릴께요.”

오래 전 엄마가 시집가셨을 때, 시골 장터에서 붕어빵을 사 드시고 할머니께 너무 맛있는 붕어빵이 있다고 편지를 쓰셨다며 그 엄마의 그 딸이라고 눈물어린 웃음을 지으셨지요. 엄마의 그 순수함을 그대로 닮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나이 들어 엄마 만큼만 되면 인생 성공이겠지요? 하지만 섭섭한 것은 그 순수함을 그대로 물려 줄 딸이 제게는 없다는 것이네요. 호숫가 앞에 두 분만이 호젓이 계실 생각을 하니 빨리 달려가서 빈자리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요. 편지로 이 모든 것을 대신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행복하게 해 드릴께요.

아버지의 사랑도 어머니 사랑만큼 큰 거 잘 알아요. 사실은 어머니보다 더 사랑해요. 애교 없는 딸이라고 마음도 그렇지는 않아요. 며칠 후 아버지랑 손잡고 시장 한번 가볼까요? 아버지 사랑해요. 샘 내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딸 형윤 드림.

■재규야… 아비 가슴에 너를 묻는다

한국해양연구원 남극 세종기지의 고(故) 전재규 대원은 남극의 블리자드(눈보라) 속에 조난 당한 3명의 동료대원을 구조하기 위해 나섰다가 보트가 전복돼 7일 사망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남극에 발을 딛은 지 열하루만에 스물일곱 생애를 마쳤다. 전씨는 착한 아들이었고, 별 보기를 좋아했으며, 화려함 없는 오지에서 한국의 꿈을 실현하는 젊은 과학도였다.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 아들…, 우리 아들아….

너무나 보고 싶어 벌써부터 목이 메인다. 지금 어디에 있니? 혹시 우리가 보고 싶어 바로 옆에 있는데 우리가 못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아들…, 고생만 하다 생을 마감하는구나.

아버지가 많이 부족해서 너무나 어려웠지. 다른 아이들이 유치원 가는 걸 보면서 늘 부러워했고, 그 흔한 학원 한번 다녀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겨울에도 차디찬 온돌방에서 자야만 했고 장난감 하나 없었고. 하지만 너는 투정도 불만도 없었다. 늘 착실한 우리 아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대견하고 기특하던지…. 우리 아들은 아버지의 희망이자 꿈이었지.

일이 험하고 힘들어도 우리 아들이 집에서 맞아주는 웃음으로 얼마나 행복 했었는지 아니?

남들처럼 가진 건 별로 없었지만 우리 아들, 딸 보면서 늘 행복함에 젖어있었지. 시골에서 힘들었을텐데 너는 혼자 힘으로 공부해서 서울대까지 진학했다. 늘 기쁘고 행복했지만 그때는 더 없이 자랑스러웠단다. 대학에 들어간 후엔 부모 부담 될까 봐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했었지. “부족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너는 늘 이렇게 아버지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면서 안심시키는 착한 아들이었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였다. 해양연구소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러 오라고. 그때서야 우리 아들이 남극에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방이 바다라 너무 위험하다고, 수영을 못하니까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건만…. 너는 의지가 너무나 강했다. 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거 하나도 없어요. 안에서만 생활 하는데요 뭘.” 우리 아들이 똑똑하니까 사실인 줄 알았는데…. 정말 그런 곳 인줄 알았는데….

11월20일. 국가에 보탬이 되겠다고 했다. 전공을 살려 심도 있게 공부하겠다고. 집에 부담을 줄여주고도 싶었겠지…. 남극으로 가기 전 짐을 꾸리며 얼마나 기뻐했는데, 1년 후에 돌아오면 우리 가족사진 찍기로 했었는데…. 우리에겐 함께 할 시간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데…, 12월7일. 우리 아들이 싸늘하게 변했구나. 추위에 떨며 꽁꽁 얼어버린 우리 아들….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단다. 아들아!

아버지의 생명이자 희망. 불쌍한 우리 아들. 그 차디찬 얼음물에 얼마나 추웠니?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엄마, 아빠 얼굴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우리 아들에게 못해준 게 너무나 많아 심장이 터질 것만 같구나. 대학교시절 생활비 한번 넉넉히 주지 못했구나. 멋진 양복 한 벌 못 입혀주었지. 따뜻하고 깨끗한 방 한 칸 제대로 못 구해주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들아! 우린 너무 준비 없이 헤어졌구나. 그래서 더욱 더 서글프다. 아버지는 지금도 우리 아들을 찾고 있단다. 지금, 햇빛 없는 답답한 사찰에서 쓸쓸히 울고 있느냐. 우리가 너무 보고 싶고 외로워서…? 우리 아들을 생각하니 이런 방 한 칸이 사치처럼 느껴지는구나. 그 외로움과 추위, 차디찬 얼음 속에서 무서워했을 우리 아들….

엄마와 나도 너에게로 가려고 했지만, 시도도 해봤지만, 너의 동생이 울먹이면서 빤히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도 저 세상으로 가면 그 때부터 이 부족했던 시간을 채우자. 그때는 우리 아들을 다신 놓치지 않을 거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더욱더 가슴이 아프다.

불쌍한 우리 아들. 이젠 그 고되었던 몸, 편히 쉬어라. 그리고 더 넓은 세상에서 못다 이룬 꿈 마음껏 펼치려무나.

너무나 부족했던 아버지가

■베스마… 너의 조국에 총성이 멈추길

여행가로 잘 알려진 한비야(45)씨는 현재 국제 구호단체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으로 활동 중이다. 올해 초 서아프리카 내전 지역인 시에라리온을 방문한 데 이어 6월부터 3개월간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에서 급수 지원활동을 펼쳤다.

보고싶은 베스마에게,

“앗살람 알레이쿰.” (당신에게 평화를)

그 동안 잘 지냈니? 후세인 전 대통령의 체포소식을 듣고 나는 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단다. 이제 겨우 10살인 너에게 이번 일이 또 어떤 소용돌이가 될까 하고 말이야.

우리가 만난 건 지난 여름, 이라크 북부 모술의 어느 조그만 학교에서였다. 우리 구호단체에서 긴급구호사업으로 학교에 식수대 및 물탱크를 놓아주는 식수사업을 벌일 때였지. 섭씨 55도를 넘는 한증막 더위에 천근 만근 무거운 방탄조끼까지 입고 다니려니 어찌나 더운지 혀가 쏙 빠질 지경이었단다. 너는 우리를 보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물주전자를 가져와서 물을 권했지. 그 물을 받아 달게 마시는걸 보고 활짝 웃던 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후 나는 네가 보고 싶어 이런 저런 이유를 만들어 너희 학교에 가곤 했다. 내가 나타나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내 손을 꼭 잡고는 놓칠 않아서 일에 방해가 될 지경이었지만, 그게 난 얼마나 살가왔는지 모른단다. 한국에도, 나만 보면 좋아서 딱 붙어 있는 꼭 너 같은 조카가 있거든.

올 봄 전쟁 중에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고 했지. 폭격소리가 나면 동생은 밤새도록 울고, 너는 무서워서 오줌을 쌌다고 했지. 전쟁이 끝났다는 데도 매일 총격전이 벌어지고, 불이 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봐야 하니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까.

어느 날 머리 위로 미군 정찰기가 지나가니 너는 귀를 막고 머리를 흔들며 “할라스, 할라스(이제 제발 그만)”라며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지.

“도대체 전쟁은 언제 끝나는 거죠?”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했단다. 너를 태어나서 단 한번도 평화롭게 살수 없게 만든 어른의 한사람으로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베스마, 나도 그 답을 알았으면 좋겠다. 2003년과 함께 이 소용돌이도 말끔히 사라지고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술을 떠나는 날, 우리는 서로의 빰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작별인사를 했지.

“마 살라마” (당신에게 평화를 두고 갑니다.)

나는 진정으로 내 평화와 기도를 너에게 두고 떠났단다. 온전한 평화가 찾아와서 긴급구호팀장인 내가 다시 이라크에 갈 일이 없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밝아오는 새해에 우리 다시 한번 희망을 걸어보자, 베스마.

저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아빠… 직장 없다고 우리아빠 아닌가요

K양은 현재 서울 E여고 1학년에 재학중이다. 올해 9월, 17년간 근무하던 대기업에서 명예 퇴직한 아버지를 위해 편지를 띄웠다.

사랑하는 아빠께.

초등학교 숙제 때문에 아빠께 편지를 써본 후 거의 5년이 넘도록 글로 제 마음을 전한 적이 없었네요. 편지 뿐인가요. 남들 다 하는 공부가 무슨 벼슬이라고, 아빠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본 기억도 가물가물한걸요. 맏딸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전합니다.

빙빙 돌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 먼저 할래요. 요즘, 우리 아빠답지 않게 너무 기운 빠지신 거 알아요? 눈 못 뜨고 침대에서 헤매는, 게으른 우리 자매를 새벽같이 일어나 천둥 같은 목소리로 깨우시던 아빠잖아요.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이랑 공을 차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아빠의 모습이 전 안정환보다 더 멋지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우리가 집 나설 때까지 누워 계신 날도 많아지고 전화도 잘 안받으시고…. 게다가 가끔 멍하니 계시는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아빠는 너무 오래 일하느라 힘들어서 이젠 좀 쉬려고 한다고 웃으셨지요.

지난 9월, 아침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오늘부터 아빠 회사 안 나간다”고 하셨을 때 사실 저 너무 놀랐어요. 미리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우리가 걱정할까 계속 미뤄오셨다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내셨죠.

그날 이후 3개월동안 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났어요.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면서 남의 일처럼 비웃듯이 얘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빠 마음 상하진 않을까 조심스러웠죠. 나쁜 사람들이라고 속으로 욕하기도 하고 그런 글이 나오면 아빠 몰래 신문을 책가방에 숨겨 나가기도 했던 거 모르셨죠?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일하고 계셨어요. 일 때문에 잠도 못 주무시고 술도 많이 드셔야 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셨어요. 아빠 말씀대로 이제 잠깐 쉬세요. 그렇지만, 잠깐 뿐이에요! 우리 멋진 아빠답게 금새 다시 힘내실 거라는 걸 믿거든요.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전 올해 연말을 아빠랑 보낼 수 있어서 은근히 너무 좋았어요. 며칠 전에 가족 넷이서 ‘반지의 제왕’까지 보러 갔잖아요. 저 아주 어렸을 때 ‘배트맨’ 본 이후로 가족끼리 영화 본 게 처음이라는 사실 모르셨을 거예요.

이제 새 해가 오면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저는 아빠 걱정 안 해요. 무얼 하시던지 멋지게 해내실 걸 알거든요. 꼭 다른 직장이 아니면 어때요. 우리 가족 넷이서 열심히, 건강하게만 산다면 뭔들 못하겠어요. 포장마차나 예쁜 액세서리 가게, 작은 책방이나 빵집, 예쁜 꽃가게도 좋겠어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괜해 아빠 힘내시라고 편지 쓰면서 저만 흥분한 것 같아요. 어쨌든 이렇게 예쁜 딸, 100% 아빠 편이잖아요. 동생이랑 엄마랑 힘 모아서 끝까지 응원할거에요. 아빠 힘내세요!

아빠 응원단장 큰딸 올림.

■여보… 희망엔 지각은 없다오

이주엽 JNH 대표는 15년간 언론사에 근무하다가 퇴사, 음반기획자이자 작사가로 변신했다. 4월 첫 음반으로 말로의 '벚꽃 지다'를 내놓은 그는 10대 편향적인 가요시장을 거슬러 30~40대를 위한 고급음악을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도전하고 있다.

내 아내이자 벗에게

나이 40. 이젠 늙는구나. 아니 이미 늙었는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난 엉뚱하게도 새 길을 꿈꾸기 시작했어. 이 늦은 시간에도 희망은 유효한가. 불혹의 나이에 새 희망을 품는다는 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그러나 난 ‘불혹’하지 못하고 새로운 유혹의 길로 갔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이 마흔이 다 돼 음반제작자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당신은 “웬 뜬금없는 이야기냐”는 듯 날 이상하게 쳐다봤지. 그러나 당신의 그 불안한 눈빛을 애써 못 본 체 하고 난 ‘가지 않은 길’을 가보기로 했어. 낯선 희망을, 설렘을 위해 불안과 두려움을 기꺼이 지불하기로 했지. 가보지 않고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이 이기적이고 무모한 선택을 당신은 용서해주었지. “아! 인생이 이리도 가볍게 바뀔 수 있다니…. 당신이 나를 이리도 쉽게 믿어준다니.” 그런 실없는 생각까지 들더군. 그래서 무모했으나 외롭진 않았어.

내가 회사를 나온 뒤 ‘38선’ ‘45정’이라는 눈물겨운 신조어가 이 사회에 유령처럼 떠돌더군. 선택하지 못하고 선택을 강요당한 인생의 그 막막함을 떠올리자 가슴 한 켠이 쓸쓸해져 왔어. 그런 까닭에 나의 자발적 퇴사는 오히려 사치였다는 생각도 들어.

올 초 첫 음반을 만들고 제작자로 내 이름 석자가 찍혀 나왔을 때의 작은 흥분과 감격을 당신도 기억하겠지. 그때 난 건방지게도 이런 생각을 했지. “거봐, 인생은 저지르는 거야, 저지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지 길이 생기지 않아?” 그런데 그 길이 다시 희미해지는 것만 같아. 내가 어디쯤 온 건지, 길을 제대로 찾은 건지, 조금만 더 가면 나의 선택에 합당한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든 게 막막해져 가.

아직 성공은 멀고 시행착오는 늘 나를 따라다니지. 하지만 난 새 길을 가고 있어. 내가 바라보는 희망의 방향에 당신의 시선도 늘 함께 하리라 믿어. 희망에 지각은 없는 것 같아. 나이 마흔에 새로 시작하는 모든 것들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거든. 이 철없는, 때늦은 나의 꿈속에 당신도 조용히 잠겨오길. 아내이자 내 벗인 그대, 그 한없이 아늑한 눈빛으로 언제나 날 지켜봐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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