윷놀이의 역사는 아주 길다. 부여족(夫餘族)시대에 5가지 가축을 다섯 마을에 나누어 주어 경쟁적으로 번식시키기 위해 고안된 놀이라고 한다.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이다. 닭이 없는 게 아쉽지만, 이 동물들의 경주는 어쨌든 재미있다. 한꺼번에 여러 말을 업고 갈 수 있고 다 졌다가도 상대를 통쾌하게 잡는 역전승의 묘미도 있다. 더구나 요즘에는 '빠꾸(백) 도'라는 장치까지 도입돼 막판에 상대를 한 방에 KO시킬 수 있다."도나 개나"라는 말은 윷판에서 유래된 말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개나 걸이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되는 물건 안 되는 물건이 다 나온다는 뜻이다. 자격이 있건 없건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이 말이 주로 쓰인다. 예컨대 내년 4·15총선에는 도나 개나 다 나올 것이다.
내년 총선이 도나 개나 다 나오는 난장이 될 수밖에 없는 요인은 많다. 오래 누적된 정치판에 대한 절망감과 정치가 달라져야 한다는 개혁요구가 첫번째 요인일 것이다. 기존 정당 내부에서까지 수구반동이나 반민주인사에 대한 퇴진압력이 커져 갈등과 논란이 계속되고 있을 정도다. 요즘 진행되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도 인적 청산과 물갈이에 폭 넓은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고, 노동계는 물론 의료 사회복지 환경등 여러 부문에 걸쳐 독자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을 만큼 우리 사회의 규모가 커졌다. 자기 분야의 발전과 이익 수호를 위해서는 지금과 달리 더 전문적인 정치활동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또 하나는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성공사례가 조장한 동기유발 효과다. 정치판에서 중심이 아니었던 그의 당선은 그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수범사례가 되고 있다. 또 정치판 주변에 어떻게든 취업을 해야 할 청년실업자들이 많다. 국회의원은 더 이상 비교할 것이 없을 만큼 좋은 취직자리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정치의 수요, 출마의 수요가 역대 어느 총선보다 더 높아진 것같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 모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려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치지망자들은 생리적으로 일 꾸미기를 좋아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위에 서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안타까운 경우는 골수에 정치바람이 든 사람이다. 정치에 실패한 뒤 종교에 귀의해 독실한 신자가 된 것 같았다가도 총선이 다가오면 사람이 달라지는 사례도 보았다. 자신은 당선될 것이라는 요지부동의 확신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고질이다.
총선이라는 윷놀이가 특이한 것은 4년마다 게임의 룰을 새로 짜는 것이다. 말판도 다시 그리고 내 편, 네 편을 새로 짠다. 그 과정이 언제나 시끄럽다. '윷짝 가르듯'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정치개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윷판 짜기가 윷짝 가르듯 공정하고 분명하게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존 정치인들의 이해를 적당히 절충해 막판에 타결짓는 것이 면면히 이어져온 관행이므로 윷판 자체가 깨질 것이라는 염려는 조금도 하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잘 됐다. 도나 개나 다 나오는 4·15총선이 정치판을 갈아 엎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정치판 갈아 엎기의 중심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 노 대통령은 지금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혁명을 해가고 있다. 논란과 비난이 끊이지 않는 독특한 어법과 행보도 그런 차원에서 해석하면 달리 볼 여지가 있다. 노 대통령은 아마도 후세의 평가에서는 대단히 의미있는 일을 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바라는 것과 같은 정치구도가 쉽게 그려지지 않고 있으며, 그 구도가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다는 점이다. 어차피 누가 도이며 누가 개인지는 유권자들이 알아볼 수밖에 없다.
임 철 순 수석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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