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게 늘 처음입니다.” 어느 시인이 아내에게 했다는 사랑의 고백은 언뜻 듣기만 해도 설레는 시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단기기억상실증 때문에 애인을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으로 알게 된다면 그것은 여전히 설렘일까, 아니면 고통일까.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복사실 직원 그래함(에두아르도 노리에가)은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칠판과 메모를 이용해 모든 것을 적으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헤어진 아내와 아들, 새로 만난 애인 이렌느도 알아보지 못한다. 직장 상사 사빈은 프레도를 섹스의 노예로 삼지만 아들과 애인은 그래함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를 쓴다.
‘메멘토’(2000)를 연상시키는 영화지만 기억상실에 대한 입장은 판이하다. ‘메멘토’에서 기억상실은 벗어날 길 없는 저주다. 기억하는 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자를 이용한다. ‘노보’(Novo)는 사랑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의 축적으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진지하지만 화법은 경쾌하고 화사하다. 특히 샤넬 모델인 이렌느 역의 아나 무글라리스가 그래함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펼치는 사랑의 유희가 무척 감각적이다. 감독 쟝 피에르 리모쟁. 18세가.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아내를 강간ㆍ살해한 범인을 쫓는 전직 보험 수사관 레너드(가이 피어스)의 극중 대사는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의미심장한 대사다. ‘메멘토’(Memento)는 단기기억상실증을 앓는 레너드를 통해 기억의 왜곡이 빚을 수 있는 비극을 말한다. 사건의 경과를 거꾸로 보여주는 정교한 시나리오가 일품이다.
웨이트리스인 나탈리(캐리 앤 모스)는 맥주잔에 왜 침을 뱉을까. 나탈리는 왜 모든 펜을 감출까. 직업도 본명도 알 수 없는 테디(조 판토리아노)는 왜 레너드를 도와줄까. 영화는 끊임없이 궁금증을 자아내며, 이 궁금증을 풀 길은 영화의 자잘한 모든 것을 잘 기억하는 길밖에 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몸에 문신하고, 문신할 수 없는 것은 폴라로이드로 찍는 레너드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탈리와 테디, 그리고 여관 종업원 바트 가운데 누가 레너드 편인지 알기가 쉽지는 않다. 게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흑백으로 처리한 레너드의 회상 장면 때문에 보는 사람은 더 헷갈리기 마련. 그러나 꼼꼼히 보면 감독이 미처 기억을 못해 놓친 옥에 티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매트릭스’의 트리니티와 사이퍼가 다시 악연으로 만났다는 점도 흥미롭다. 15세가.
/이종도기자 ecr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