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7> 박지원 vs 정약용-평행선을 달린 18세기 두 지성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7> 박지원 vs 정약용-평행선을 달린 18세기 두 지성

입력
2003.12.25 00:00
0 0

1792년 10월19일 정조는 동지정사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명청소품(明淸小品) 및 패관잡서(稗官雜書)에 대해 강경한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와 더불어 과거를 포함해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 검열이 실시된다.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아 고문(古文)을 부흥시킨다는 명분을 놓고 국왕 정조와 노론계 문인들이 첨예하게 대립한 이 사건이 바로 '문체반정(文體反正·문체를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건의 정점에서 정조는 문풍을 타락시킨 원흉으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를 지목했다. 연암은 당시 개성 근처의 골짜기인 연암협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때 혈기방장한 20대 후반의 관료였다. 경력을 쌓고 있던 다산은 이 즈음 패관잡서를 천지간에 비할 바 없는 재앙이라 규정하고, 이 책자를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 오는 자는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책문을 지어 올렸다. 연암협에 은거하면서 배후조종자로 낙인 찍힌 연암과 최선봉에서 발본색원을 외친 다산. 한 사람이 부귀도 권세도 없는 50대 문장가였다면 또 한 사람은 생의 절정기를 맞은 젊은 관료였다. 18세기 지성사의 빛나는 두 별, 연암과 다산의 팽팽한 대립과 긴장을 그들의 생애와 글쓰기 전반에 걸쳐 두루 확인할 수 있다.유쾌한 노마드와 비운의 정착민

연암은 당시 주류 집권층인 노론 경화사족(京華士族·한양이나 그 인근에서 대대로 살아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가문의 촉망 받는 천재였지만 일찌감치 입신양명의 길을 접었다. 신분과 당파의 경계를 가로질러 우정의 연대를 실천했고, 백탑(탑골 공원) 근처에서 서유구, 이덕무, 박제가 등 소위 '연암그룹' 문인들과 어울려 북벌론에 맞선 '북학(北學·청나라 문명 배우기)' 패러다임을 창안했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단을 따라 중국여행에 참가했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남겼다. 잠시 벼슬살이를 한 적도 있지만, 곧 물러나 조용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생애는 밋밋하기 짝이 없다. 이름깨나 날리는 사대부들이 겪은 유배나 정치 스캔들도, 시대와 불화한 천재의 고독한 그림자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삶과 글을 관통하는 건 경쾌한 유머와 패러독스다. 말하자면 그는 권력과 직접 맞서기보다 그 외부에서 새로운 경계를 열어 젖힌 유쾌한 노마드(유목민)였던 것이다.

다산은 그와 정확히 대칭될 만한 인물이다. 권력에서 배제된 남인 출신이었지만 정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스물 두 살에 과거에 합격했고, 스물 세 살에 '중용'에 대한 답변을 올린 이후 정조가 관료들을 상대로 시험을 치를 때마다 계속 수석을 차지했다. 연암의 생애가 아련한 운무에 휩싸여 있다면 다산의 생애는 상승과 하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 눈부신 도약의 시절을 맞은 그의 삶은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1801년 순조 즉위 초 천주교를 믿었던 그의 가문은 신유박해로 풍비박산된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그는 이후 장기와 강진에서 장장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가혹하게 추방당했어도 그는 한번도유교적 이상사회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꽃핀 다산학의 엄청난 양과 질은 그 꿈에 대한 열렬한 표출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영원한 제국' 내부의 정착민이었다.

전위적 스타일리스트 연암 박지원

다산을 대표하는 시는 '생식기를 자른 것을 슬퍼하다'는 뜻의 '애절양(哀絶陽)'이다. 강진 유배 시절 노전(蘆田)에 사는 한 백성이 낳은 지 사흘 된 아이가 군보(軍保·병역을 면제 받은 사람에게 병역 나간 집안의 농사일을 돕게 한 것)에 등록되자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베어버렸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식기를 가지고 관가로 가서 울면서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 섰다. 그 사연을 그대로 옮긴 것이 이 시다.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그 내용을 직설로 옮긴 다산의 '뚝심'도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1980년대 문학 비평 공간에서 다산의 시가 각광을 받았다.

거기에 비하면 연암은 전위적 스타일리스트에 속한다. 의미를 몇 겹으로 둘러치거나 다방면으로 분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반전'을 보자. 정선 부자가 가난한 양반에게 돈을 주고 '양반증'을 산다. 양반이란 무엇인가? 그걸 해명하는 게 첫 번째 문서다. 부자가 "양반이 겨우 요것뿐이란 말씀이우"라고 투덜거리자, 두 번째 문서가 작성된다. 증서를 반쯤 써갈 때, 부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빼면서 "아이구 그만두시유. 참 맹랑합니다그려. 당신네들이 나를 도둑놈이 되라 하시유" 하고 머리채를 휘휘 흔들면서 달아나 버렸다.

결국 이 작품의 골격은 두 개의 문서가 전부이다. 그것을 통해 양반의 위선과 무위도식, 패덕 등을 간결하게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해학과 풍자, 아이러니와 역설 등 다양한 수사적 전략이 담겨 있다. 저자의 의도를 한눈에 간파하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연암은 표현 형식의 전복에 몰두한 반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연암이 보기에 당대의 지배적 문체인 고문은 마치 부호체계처럼 경직되어 생동하는 흐름을 질식하는 억압기제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삼라만상에 흘러 넘치는 '생의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고문의 전범적 지위를 와해해야 했다. 그러한 욕망이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옛 사상이나 문체에서 벗어나 현실의 다양한 면모와 각양각색의 인물군상을 생동감 있게 담은 새로운 문체)와 접속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연암의 문체 실험이 소품체로만 향한 건 결코 아니다. '열하일기'가 잘 보여주듯 그는 고문과 소품체, 소설 등 다양한 문체를 종횡했다. 연암의 특징은 무엇보다 유연한 '횡단성' 자체에 있다. 대상과 소재에 따라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이런 능동성이야말로 '표현 기계'로서 연암의 우뚝한 경지이다.

지배담론에 맞선 다산의 '혁명적 의미화'

다산은 그와 달리 지배적 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거대한 의미체계를 새롭게 구축했다. 그에게 진정한 시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고 세상을 경륜하려는 욕구가 충일한 상태에서 문득 자연의 변화를 마주쳤을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닌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그는 문장이 담아야 할 내용을 '수기(修己)'에서 '치인(治人)', 곧 사회적 실천에 관한 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는 시의 도(道)를 '도덕적 자기완성의 내면적 경지'가 아니라 '외부로 뻗어나가 실제 성취에 도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도를 선험적 원리의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범주로 전환한 것이다.

그의 맥락에서는 '실천해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이 불타는 열정이 그를 요·순, 주공, 공자가 다스리던 '선진고경(先秦古經)'의 세계로 인도했다. 즉, 다산은 경학(經學)을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다산이 패사소품체를 격렬히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가 보기에 소품문들은 "음탕한 곳에 마음을 두고 비분한 곳에 눈을 돌려 혼을 녹이고 애간장을 끊는 말"들일 뿐이다. 따라서 그런 글들은 제거해야 마땅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세가인 다산이 엄청난 양의 시를 쓴 데 비해 정작 문장가인 연암은 시의 격률이 주는 구속감을 견디지 못해 극히 적은 수의 시만 남겼다. 전자가 시에 혁명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면, 후자는 시의 양식적 코드화 자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않는 평행선의 운명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하나는 동시대를 풍미한 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길이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연암이 다산처럼 살 수 없듯, 다산 또한 연암의 길을 갈 수는 없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그들은 분명 평행선의 운명이었다. 평행선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평행선은 결코 헤어지지도 않는다. 치열하게 맞서면서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 바로 평행선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만들어내는 이 도저한 열정이 있었기에 18세기 조선의 사상사는 놀라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 미 숙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그림/박성태·화가

● 연암 박지원

1737년 서울 서소문 밖 야동(冶洞)에서 태어났다. 명문거족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거지와 부랑자, 분뇨장수 등 거리의 떠돌이들과 교유했다. 고전소설사의 한 봉우리를 차지하는 '방경각외전'이 바로 이들에 대한 체험담이다. 홍대용, 정석치, 박제가 등과 더불어 북학에 입각한 새로운 문명론을 모색했다.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꿈에 그리던 중국여행을 했고, 그때의 충격과 감동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 '열하일기'다. 주옥같은 묘비명과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을 다수 남겼다. 1805년 69세로 생을 마감했다.

● 다산 정약용

1762년 경기도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39세 되던 해 정조가 승하하고, 이듬해 1801년 신유사옥으로 장기와 강진에서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수많은 농민시를 비롯해 '목민심서' '아방강역고' '논어고금주' 등을 쓰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1818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변함없이 학문적 열정을 불태우다가 1836년 75세로 운명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