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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4> 위기의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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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4> 위기의 남편

입력
2003.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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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여자'와 만나던 6개월 동안 나는 모니크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세상 어느 불행이 내 불행만큼 절실하고 처절했을까. 나는 남편이라는 한 상대를 통해 얻는 고통이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는게 화가 났지만 그 사실을 부인할 순 없었다. 내 위기는 '남편의 여자'라는 지겹고도 상투적인 구도 속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장 묻진 않았다. 자존심은 캐묻고 싶은 원색적 욕구보다 더 강했다.남편은 말이 적다. 그 지독한 단답형과 생략 위주의 화법에 가끔 저 사람은 말하는 것을 혐오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을, 아니 '설명'이란 말이 있기나 한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어쩌다가 집에 있는 그 희귀한 날이면 남편은 평범무쌍하고 시시한 다른 남자들처럼 신문, TV, 만화에만 몰두했다.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나는 언제나 그 이유 모를 권태로움이 보기 싫었는데 그날은 심술까지 겹쳐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차 안에 웬 여자 수첩이 떨어져 있던데, 누구예요? 사진 보니까 예쁜 얼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적인 데도 없고…. 여하튼 신분증은 직접 나한테 와서 찾아가라고 해요." 이틀 후 남편은 지나칠 정도로 씩씩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김이 피어오를 것 같았다. 거울이 깨지고, 화장품과 방안의 올망졸망한 집기들이 공중을 날았다. 결혼 14년 만에 처음이었다.

나는 그런 일에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약간 어이가 없었을 뿐 아주 침착해져 있었다. 남자가 약이 올라 '디스트로이즘'에 빠져 있는 얼굴은 코믹하기까지 했다. 심각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어딘지 신나고, 재미있고, 웃음까지 나왔다. 인생은 연극이라더니 지금 그 짝 났네, 이 순간 저 사람은 얼마나 그럴 듯한 연기를 하고 있나, 배우인 나는 관객이 되어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방에 시아버지, 시어머니, 아이들이 잠자고 있어 그 장면이 끝나기를 말없이 기다리며.

남편은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이 들었다. 코까지 골았다. 막이 내린 것이다. 내가 갈 곳은 조금 전까지 열연을 펼친 남편의 옆자리 밖에 없다는 자각이 밀려왔다. 나는 서글퍼졌다. 그리고 원하지 않았던 눈물이 흘렀다. 이건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구나. "내일부터 연극할 생각 말어. 꼼짝 말고 집에만 있어." 코골기 전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한 채의 이부자리 속 그의 옆에 누웠다. 내 맘은 처절하게 찢겼다.

시간은 흘러 그때를 '회상'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니크의 남편 모리스는 새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어쩌면 그리 쉽게 꺼낼 수 있었을까? 프랑스 남자들은 다 그런가? 한국 남자들은 용기가 없나? 그 후에도 나는 계속 '위기의 여자'를 공연했다. 남편이 극장에 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로 느껴졌다. 연극은 화제의 정점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쓸쓸한 가을 풀밭 같았다. 남편 없는 객석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초조했다. 그가 극장에 오지 않은 채 이번 연극이 끝나면 어쩌지? 우리 사이가 원만해질 수 있을까? 나는 어느새 그가 연극을 보러 오는 시점이 우리가 화해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정해놓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 가고 있던 어느날 나는 분장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극단의 한 후배가 숨을 몰아 쉬며 나를 불렀다. "박 선배, 털 모(毛)자 모리스, 진짜 모리스가 왔어요(남편은 턱수염을 십 년째 기르고 있었다). 표두 사구 프로그램도 사구요"

그날 나는 떨었다. 그가 본다고 해서 긴장하는 내가 싫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무대 위에 처음 선 신인보단 약간 나았을 것이다. 남편 앞에서 더 원숙한 연기를 보이고 싶었는데 나는 연극을 망쳐버렸다. 그건 가장 심각한 나의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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