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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띄우는 편지

입력
2003.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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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악! 깍." 까마귀 한 마리가 보입니다. 한라산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새는 까마귀입니다. 이제는 수가 많이 불어 아예 떼로 날아다닐 정도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까마귀려니 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자꾸 따라옵니다. '왜 사람을 따라올까?' 등산로의 중간 지점에 있는 대피소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등산객에게서 과자 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따라 다닌다는 겁니다.'거지 갈매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바다 관광지에 많습니다. 울릉도, 강화도 등이 대표적입니다. 주로 유람선을 따라 다닙니다. 관광객이 던져 주는 과자를 얻어 먹습니다. 하늘을 날며 과자를 낚아채는 갈매기의 모습에 관광객들은 환호합니다. 모 과자의 CF에 등장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갈매기들은 직접 물고기를 사냥하는 본성을 잃습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갈매기는 배가 고프면 관광지 식당가의 쓰레기통을 뒤집니다. 그래서 '거지 갈매기'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습니다.

한라산의 까마귀도 이제 '거지 까마귀'가 될 판입니다.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 부근에는 하얀 눈 사이로 까마귀떼가 까맣게 내려 앉아 등산객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등산객이 과자를 던져 주면 몇 마리씩 달려 들어 마치 싸움을 하듯 경쟁을 합니다.

한 겨울에 굶고 있는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던져 주는 마음은 따뜻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까마귀에게 이롭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직접 먹이를 구하지 않고 사람들만 바라 보게 될 것입니다. 얻어 먹는 까마귀도 문제이지만 자꾸 주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바다의 '거지 갈매기'와 산 위의 '거지 까마귀'를 보면서 이 땅의 정치를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따라다니며 달라고 하는 사람과 선뜻 주는 사람. 그래서 그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게 되는 게 아닐까요.

한라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백록담은 정말 하얀 세상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4년은 백록담처럼 하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느 등산객의 외침을 마음 속으로 함께 했습니다. '잘∼ 가라,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거지 정치'에 멍든 2003년에게 말입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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