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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3> 객석의 모니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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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3> 객석의 모니크들

입력
2003.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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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멀리 있었다. 겨울의 냉랭한 숨결이 가쁜 숨을 몰아치던 1986년 2월 나는 '위기의 여자'와 만났다. '위기의 여자'는 시몬느 드 보봐르의 소설을 희곡작가 정복근이 각색한 것이다. 안정된 중류 가정의 행복해 보였던 한 여자가 뜻밖의 어두움에 실족한다. 인생의 조건을 사랑과 결혼에 두고 성공했다고 믿었던 모니크에게 어느날 남편 모리스는 애인이 있다고 고백한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모범적인 부부 사이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균열이 암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놀라움, 초조, 분노의 어지러운 감정 속에서 모니크는 처음으로 자기를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이 대본은 마치 가려움처럼 나를 못 견디게 했다.'위기의 여자' 대본이 내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연히 방송국 로비에서 연극 연출가 임영웅 선생을 만났는데 그는 배역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위기의 여자'는 산울림 소극장 1주년 개관기념작으로 예정돼 있던 만큼 더욱 조심스러웠을 터이다. 나는 그와 함께 배우 여럿을 열거하다가 결론 없이 헤어졌다. 며칠 후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우린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히 배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가 고민하는 배우의 목록 속에 나는 들어 있지 않았다. 나도 중년의 모니크만큼 살았고 모니크는 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배역이었다. "위기의 여자, 왜 나는 못 하나요?"

이 말은 부지불식간에 나왔다. 그렇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내 물음에 정당성을 발견했고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설득당했다. 나는 배우니까. 그러나 그는 의외의 제안에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박정자라는 배우는 위기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일축했다.

20년 넘은 무대생활을 통해 '강렬한 이미지'가 나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호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위험한 개성을 사랑해 온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자존심을 다쳤다. 나에게서 위기를 느낄 수 없다면 나는 '여자'를 박탈 당한 사람인가. 여자로서의 서정도 없는? 우리는 서먹서먹하게 헤어졌다.

오후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장 만나자." 그날 저녁 우리는 서초동 난다랑에서 만났다. 차가운 맥주를 마주하고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위기의 여자' 대본의 촉감만이 선명하게 손에 잡혀왔다.

연습이 시작됐다. 연출자는 내게 '체온'부터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평소 무대 위에서 80도인 내 체온을 20도로 낮추라는 것이었다. 얼어 죽으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옳은 말씀. '지금까지의 열혈 배우 박정자는 일단 죽은 것으로 치자. 다시 태어나자. 전혀 다른, 새로운 배우로 모든 사람과 만나자.'

한달 반의 연습은 나를 죽이는 작업으로 일관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위기의 여자'를 준비하고 있다는 데 관심을 보인 반면 나의 모니크 역에 대해서는 짜기라도 한 듯 회의적이었다. 그들의 회의와 나의 안간힘 속에서 심판의 그날은 다가왔다. 3월 30일 극단은 연극평론가와 여성단체장, 대학교수, 신문기자 등을 초청해 시연회를 열었다. 나는 그날 따라 더욱 생생한 긴장을 느꼈다. 연극 배우가 아니라면 상상으로 밖에 느낄 수 없는 고통이기도 했다.

마약에 취한 듯한 1시간 40분이 흘렀다. 연극은 끝났다. 한 대학 선배는 "박정자가 모니크역을 맡은 데 대한 불안이 모두 사라졌다"고 평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안도와 자잘한 성취감이 뒤섞인 긴 호흡이었다. 그렇게 '위기의 여자'는 공연 시작 전부터 하나의 파란을 만들고 있었다. 산울림 극장은 매일 주부 관객으로 넘쳤다. 매스컴은 익숙하지 않은 이 '사건'을 연일 보도하느라 바빴다. '위기의 여자에 위기의 여자들이 몰려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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