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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재가 되어 돌아간 탈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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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재가 되어 돌아간 탈북자

입력
2003.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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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을 중국과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내게 박영세란 인물은 옹이처럼 박혀 가슴을 저미곤 한다. 서울대 문리대 중문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62년 월북, 30여년이 지난 94년 탈북했다가 불과 5일만에 한줌의 재가 되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간 박영세.내가 그를 만나 것은 94년 2월16일 새벽,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수도인 옌지(延吉)에서였다. 당시 난 중국 한인협회 회장으로 옌지시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직원 한 사람이 박영세를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평소 조선족 동포나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가기 위해 접근하는 경우가 있어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겹겹이 껴입은 여름옷 속에서 불쑥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에서 교복을 입고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심상찮은 사연이 있음을 직감한 난 그를 집안으로 들이고 밥부터 차려주었다. 그는 밥 두 그릇을 정신없이 먹으며 고등어는 25년만에, 김은 30년만에 먹어본다고 했다.

박영세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북한의 '인간 지옥'과 같은 실상을 남한에 알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했다고 털어놨다. 북에는 아내와 1남2녀가 있다고 했다.

박영세는 62년 5월 서울대 2학년때 월북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일본을 거쳐 북한 원산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곧바로 김일성을 면담, 김일성대학 영문학부에 편입해 학교를 다닐 정도로 환대를 받았고, 수리조합의 말단직에서 근무하던 그의 부친은 '의거 입북'한 아들 덕에 중앙부서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72년 그의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어 부친은 평양의 중앙부서에서 함북의 남포탄광으로 밀리면서 끝이 났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74년에, 어머니는 75년에 사망했다.

박영세는 함북 회령에 살다 94년 2월14일 아침, 부인이 직장에 출근한 뒤 집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낮에는 산속에 숨고 밤에만 걸어 연길에서 20㎞m 떨어진 룽징(龍井)까지 와서 조선족 택시운전사에게 갖고 있던 낡은 구소련제 시계를 주고 "남조선사람에게 데려 달라"고 부탁해 나에게까지 왔다고 한다.

난 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베이징(北京) 공사관에 긴급 전문을 쳤고 하룻만에 '경복고 출신의 서울대생 박영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탈출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통화가 도청돼 그 해 2월18일 새벽 중국공안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나와 박영세는 중국 공안에 연행돼 함께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박영세는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고, 또 내가 다칠까 봐 조사를 받던 중 혀를 깨물어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돼 북한에 송환됐다.

요즘도 탈북자 문제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면 미처 탈출시키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박영세의 얼굴이 떠오른다.

조 흥 연/(주)황금산트레이드 회장· 한중경제인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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