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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한국의 대안운동]대구 대안가정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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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한국의 대안운동]대구 대안가정운동본부

입력
2003.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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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안가정운동본부 사무국장 김명희(42)씨 집에는 딸이 둘이다. 이 가운데 김씨가 직접 낳은 아이는 없다. 큰 딸(초등학교 6학년)은 할머니랑 살다가 할머니마저 양로원에 들어가자 2001년부터 김씨가 키우고 있다. 흔히 말하는 '위탁 아동'. 둘째 딸(1학년)은 1997년에 김씨가 입양했다. 이들을 김씨는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이라고 말한다.아버지가 제 자식을 차가운 강물에 버리는 섬뜩한 사건이 터진 날, 경악한 네티즌들의 반응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었다. "예전에는 자식을 복지시설 앞에 버리는 부모를 비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그들은 자식들이 잘 살아주길 바랐던 것이 아닌가 싶어 차라리 나아보인다"고. 보육원에 아이를 버리는 부모도 있지만 그보다 더 애쓰는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까지 따뜻한 가정에서 아이를 품어주기를 바란다.

이들을 위해 생겨난 것이 가정위탁보호제도이다. 보건복지부는 전국에 16개 가정위탁지원센터를 만들어 친부모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키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맡아 키워주는 가정에 월 6만5,000원의 지원을 해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혜택의 가시권 밖에서도 고통을 겪는 아이들이 있다.

대구의 대안가정운동본부는 회원들의 기금을 모아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까지 가정위탁이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단체이다. 이들은 위탁보다는 대안가정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위탁이라는 단어가 생명을 가진 존귀한 존재에게 붙이기에는 너무 몰인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대안가정운동본부가 생겨난 것은 2002년 7월. 하지만 그 모태는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 지역의 대학생 연합서클이었던 로타렉트 회원들이 82년부터 보육원 봉사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 경북대 지질학과 출신으로 초창기 멤버인 우병걸(39·경북 왜관 순심고 지학 교사)씨는 "원래는 농촌 봉사활동을 했는데 방학이 아닌 평소에도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보육원에 갔다. 아이들한테 학습지도를 해달라고 해서 1주일에 이틀씩 찾게 되었다"고 말한다. 보육원을 자주 찾다보니 아이들을 집단시설에서 키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복지시설의 종사자들이 아무리 헌신적으로 일하더라도 시설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일 수 밖에 없었다.

영남대 심리학과 출신으로 서클 멤버였던 김명희씨가 88년부터 보육원에서 직접 보육사로 일하면서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물리적 환경은 좋아졌지만 단체생활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 연령대가 다양한 아이들이 벨소리에 잠을 깨는 것을 시작으로 모든 생활을 신호음에 따라 꽉 짜여서 해야 하니 아이들의 개성을 살려줄 수가 없다. 엄마가 며칠만 비워도 불안한 것이 아이들 심정인데 보육사가 바뀌어야 하는 것도 근본적인 문제였다"고 김씨는 말한다.

이들은 89년 사회복지시설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시설이 아닌 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방법은 없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생각해낸 대안은 바로 대안가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 형태는 SOS어린이집처럼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94년에는 대학생, 대학원생 단체에서 일반 시민도 동참하는 '우리 복지연구회'로 단체성격도 발전시켰다. SOS어린이집이 엄마만 있는 것과 달리 이들이 꿈꾸는 대안가정은 아버지도 있는 가정이었다. 이들은 엄마로는 당연히 보육사인 김씨를 지목했다. "선배가 나서 준다면 우리가 돕겠다"고 했다. 아버지로 선택된 이는 당시 대학원생이던 은재식(38·우리복지시민연합 사무국장)씨였다. 경북대 지질학과를 나오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은씨는 대안가정이 만들어진다는 말을 듣고 서슴없이 공부를 접고 대구로 돌아왔다.

1995년 대부분 교사나 대학원생, 대학생이던 회원들은 돈을 추렴해서 권리금 260만원을 모아 방 두개짜리 독채 월세를 얻었다. 대안가정은 '해뜨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씨는 첫번째로 데리고 있었던 위탁아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열 살인데 학교도 못 가고 공장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를 데려왔다. 엄마는 청각장애인인데 2년 뒤에 엄마가 아무 대책 없이 아이를 데려갔다. 그 후로도 1년동안은 쫓아다니면서 아이를 돌보려고 했지만 그 후로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 후로도 김씨는 7명을 더 키워냈다.

대안 아버지와 대안 어머니였던 은씨와 김씨는 97년에 결혼을 했다. 우병걸씨는 "둘이 따로 결혼하면 새로 아빠를 구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 많이 했는데 둘이 결혼한다길래 참 잘됐다고 했지요"하고 웃는다. 98년에는 우리복지연구회가 우리복지시민연합으로 확대되고 이를 모태로 작년에 대안가정운동본부가 생겼다. 제2, 제3의 해뜨는 집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대안가정운동본부는 모든 것이 회원 200여명의 후원회비로 꾸려진다. 5,000원부터 20만원까지 월회비는 다양하다. 가장 월회비를 많이 내는 사람은 본부 이사장 이수형(43·공인회계사)씨이다. 그는 95년 '해뜨는 집' 후원자로 이 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올 2월부터 이달 중순까지 여섯 살인 준이를 맡아 키우기도 했다. 미혼모로 준이를 키우느라 뚜렷한 직장을 잡기가 힘들었던 준이엄마는 10개월동안 자리를 잡아 15일 아이를 데리고 갔다. 이씨의 아내 안효자(42)씨는 "중1, 중 3짜리만 있어 시간이 넉넉하다가 유치원생이 오면서 많이 바빠지긴 했지만 준이가 아주 밝고 명랑해 키우는 게 힘들지 않았다"며 "준이처럼 미혼모가 혼자 키워도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 아주 건강하게 큰다는 것을 보면서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나 겉으로 보이는 가정 형태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또다시 실감했다"고 말한다.

대안가정운동본부에서 지금까지 키워준 어린이는 20명. 그러나 이들이 모두 준이처럼 밝고 명랑하지만은 않다. 대부분 부모의 파산, 가정폭력에 이은 가정해체를 겪다 보니 심리가 불안정하다. 이들을 데리고 그 상처를 보듬어주어야 하는 것도 대안부모가 할 일이다.

이미순(40·서울 관악구 신림동)씨는 한달 전 정규(6) 정환(4) 형제를 받아들였다. 대학생 아들 하나라 편했던 그는 요즘 아이들 잠자리며 입성이며 먹을 것을 살피느라 바쁘다. "처음에는 조용한 집에 웬 아이냐며 반대하던 남편이 아이들이 오고는 화장실에 향기나는 만화 휴지를 사왔더라"며 자랑하는 이씨는 요즘 매일밤 두 아이와 잠을 잔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동생은 밥도 잘먹고 울며 소리치기도 하는데 큰 애는 돌아서면 쉬가 마렵다고 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눈물을 꾹 참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프다"고 이씨는 말한다. 이씨는 25평 아파트에 사는 그야말로 평범한 서민. 그는 "나도 아들이 어릴 때 맞벌이를 하면서 누군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며 "애를 위해서가 아니라 또다른 나자신인 엄마들을 위해서 이 운동에 동참했다"고 말했다.

현재 위탁가정으로 지정되면 정부로부터 다달이 6만5,000원의 지원비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양육아동이 생활보호대상자일 경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월 28만원 정도의 생활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면 의료보험이나 교육도 무료가 가능하다.

문제는 이 같은 지원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령 어린이의 부모가 직장이 있으면 박봉일지라도 혜택을 받기 힘들다. 부모와 함께 살면 더욱 그렇다.

이 같은 사각지대를 보완하기 위해 대안가정운동본부는 일단 버려질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완전히 책임질 각오를 하고서 데려온 후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절차를 밟아나간다. 또 정부 지원에 앞서 초기 지원금을 본부가 대안가정에 지급해준다.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지 못하면 월 양육비 15만원과 옷값 연 10만원을 본부에서 지원해주고 그밖의 치료와 상담을 본부가 맡는다. 송광익소아과 원장인 송광익씨, 구미순천향병원 예방의인 우극현씨, 범어연세치과 원장인 이상훈씨 등이 이사로 이들의 무료진료를 돕고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지 못한 경우는 딱 한명 뿐이었다. 이혼모인 엄마가 박봉이나마 직업이 있다며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지 못한 아이는 해뜨는 집에서 그냥 키워줬다. "덕분에 엄마가 기숙사 있는 공장에 들어가 잔업까지 하며 억척스레 돈을 벌더니 8개월만에 아이를 찾아갔다"고 김씨는 전한다. 대안가정운동본부를 통해 대안가정을 찾았던 아이 가운데는 4개월만에 부모 품에 돌아간 아이도 있다. 김씨는 "대부분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서 자기를 추스리기도 힘들기에 아이를 맡기려고 하지만 가정위탁을 신청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아직 대안가정운동본부에는 상담이 들어오는 아이들이 맡아주려는 가정보다 많다. 김씨는 "너무 천사표처럼 잘해야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남을 돕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자신감을 갖고 동참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보호필요 1만2,000명 가정위탁 3,000명 불과

2001년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보호를 필요로 하는 아동 수는 1만2,086명.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인 6,171명이 보육원에서 산다. 가정위탁은 3,090명으로 그 절반 정도이다.

2001년 통계이긴 하지만 대안가정운동본부가 있는 대구는 요보호 아동 숫자 자체가 223명으로 서울(5,398)이나 부산(2,147)은 물론 인구가 적은 광주(299)보다 적으나 201명이 보육원에 들어가고 단 2명만이 가정위탁을 받고 있다. 대안가정운동본부를 통해 가정위탁을 맡아주는 가정도 현재 경기 서울 경북 경산에 흩어져 있다. 한국수양부모협회를 1998년에 만들어 가정위탁 제도화에 크게 이바지한 박영숙 회장도 경북대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퍽 특이한 현상이다.

시도별로는 서울이 시설(1,069명)보다 가정위탁(2,552)이 더 많은 유일한 곳이었으며 부산은 시설(2,096)이 가정위탁(35)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광주는 274명이 시설에 맡겨졌으며 가정위탁은 전무했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충북이 전체 181명 가운데 78명이 시설에, 67명이 가정에 맡겨져 아동에 관한한 확실히 양반스런 지역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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