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3편 '왕의 귀환'엔 선의 얼굴은 있지만 악의 얼굴이 없다. 사루만의 퇴장 때문이다. 사루만은 1·2 편에서 평화로운 세계에 분란과 갈등을 선사한 매력적인 악역이다. 사루만으로 인상적인 악역 연기를 펼친 크리스토퍼 리(사진·81)는 꺽다리 마법사 간달프(이안 맥켈런)보다 머리 하나가 위인 장신(196㎝)으로 출연작만 220여 편에 달하는 팔순의 베테랑이다.피터 잭슨 감독은 '왕의 귀환'의 첫 부분에 사루만의 이야기를 넣으려 했지만 결국 사루만이 등장하는 7분 가량을 통째로 들어냈다. 1편 '반지원정대'가 원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톰 봄바딜 이야기를 뺐듯 사루만의 몰락과 샤이어 전투를 생략한 것. 사루만이 호빗의 땅 샤이어를 두고 호빗과 겨루는 샤이어 전투와, 원정대를 저주하는 장면은 아예 촬영을 하지 않았다. 3편 초반부 "그는 탑에 갇혀 힘을 잃었다"는 간달프의 대사가 유일하게 사루만의 존재를 암시할 뿐이다. 절대반지를 불의 산에 폐기하고 귀향한 호빗과, 호빗의 땅 샤이어를 차지하려는 사루만 사이의 일대 혈전인 샤이어 전투도 빠졌다. 피터 잭슨이 펠레노르 전투와 반지 폐기를 중심으로 3편 이야기를 짜느라 사루만의 존재를 배제한 것이다. 원작에서 데네소르왕이 지녔던 존재감도 상당 부분 약해졌다. 용기와 품격을 갖춘 인물로 묘사된 그가 광기에 휩싸여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실성한 왕으로만 나왔다. 아라곤이 왕위에 올라 뭇 백성에게 치유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잘려나갔다. 피터 잭슨은 3시간 20분 이상을 넘어가는 상영시간도 줄이고 줄거리도 압축하면서도 '원전 중심'으로 찍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AP는 주요 악역인 사루만이 사라짐으로써 "숱한 광(狂)팬을 분노하게 했고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했다"면서 네티즌 4만명이 사루만의 퇴장에 불만을 품고 피터 잭슨 감독에게 사루만의 장면을 다시 '복권'시켜달라고 요구했다고 전했다. 피터 잭슨 감독은 "새로운 영화를 위해 작년 2편 '두개의 탑'에서 (사루만을) 끝내야 한다고 느꼈다"며 내년 가을에 나올 확장판 DVD에 삭제 장면을 꼭 집어넣겠다는 약속으로 무마했다.
당사자인 크리스토퍼 리는 상심이 컸던 듯하다. 그는 영국 ITV―1과의 인터뷰에서 잭슨의 결정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원작자 J.R.R. 톨킨(1892-1973)과 생전에 교류한 사이였던 데다 50년 동안 매년 '반지…'를 읽은 '반지의 광팬'인 그로서는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