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 8월22일 이른 아침 황해도 배천군수 이술원은 관아에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배천군 유향소(留鄕所)에서 한 장의 소장(訴狀)이 날아왔다. 배천군 하금산방 상일리에 사는 원재한이라는 자가 자신의 의붓어머니 김씨가 며칠 전인 19일 상이리에 사는 양반 이봉진에게 맞아 죽었다며 유향소에 고발했다는 것이었다.조선시대 지방 사또에게 살인사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명의 중요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술원은 급히 관아의 서리배와 의생(醫生), 율생(律生) 및 오작노(作奴·검시를 돕는 관노)를 불렀다. 관아로부터 북으로 50리쯤 되는 먼 거리였지만 한시가 급하였으므로 아침 일찍 서둘러 현장에 갈 셈이었다. 상일리의 시장 변에 있는 김씨 부인의 집에 도착하자 구타 흔적이 역력한 시체가 놓여 있었다. 이장과 동수(洞首) 등 마을 책임자들, 유족과 이웃을 포함한 사건 관련자들이 현장에 모여 있었다.
어머니의 원수 이봉진을 처벌해 주소서
사또 이술원은 고발자인 아들 원재한의 진술을 듣고 있었다. 죽은 김씨 부인은 자신의 의붓어머니인데 5년 전 아버지와 사별한 지 한 달여 만에 이봉진이라는 양반의 첩살이를 시작했다가 올해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자 화가 난 이봉진이 구타해 죽였다는 주장이었다.
"이번에 죽은 김 여인은 저의 의붓어머니입니다. 제 의붓아버지는 김덕삼(金德三)이라고 합니다. 양부모와 저는 각각 다른 집에 살고 있었는데, 신해년(1791년) 4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바로 이웃 동네에 사는 양반 이봉진이 제 어머니와 간통한 후 첩으로 삼으려고 자주 왕래했습니다.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금년(1795년) 6월부터 어머니와 서로 다투더니 이봉진이 시장에 와서도 다른 사람의 집에서 머물고 저의 어머니를 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이를 원통하게 여기고는 항시 제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녀도 없고 몸을 맡길 곳도 없으니 부득이 다른 사람에게 개가(改嫁)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간청하여 말리곤 했습니다만 어머니는 듣지 않고 이달 17일 읍내에 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씨 양반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이달 19일은 마을의 장시(場市)가 열리는 날입니다. 이날 술에 취한 이봉진이 어머니가 남편을 새로 얻었다고 원망하며 꾸짖더니 갑자기 머리채를 잡아 끌고 손으로 구타하고 발로 밟기를 그치질 않았습니다. 제가 간신히 풀어 달라고 간청해 어머니를 피하도록 한 후 다음날 아침 20리쯤 떨어진 곳에 사는 의붓누이에게 어머니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매부 옥사택(玉士宅)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집 안의 집기와 소는 이봉진이 모두 가져간 후였고 제 어머니는 동네 함동이의 집에 누워있는데 병세가 위중했습니다.
저와 매부 옥사택이 부축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창호가 모두 부서져 있고 침구는 모두 찢겨져 있는지라 어머니가 몸을 가릴 곳이 없었습니다. 이미 심하게 맞은 데다 풍기(風氣)에 접촉해 점점 위중해지므로 관아에 고발하기 위해 21일 유향소로 향하는데 옥사택이 뒤쫓아 와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므로 고장(告狀)을 낸 것입니다.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해 주십시오."
구타한 일 절대 없소이다
그러나 양반 이봉진은 절대 김씨를 구타한 일이 없다고 버텼다. 도리어 김 여인의 상처는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한 채 땅바닥에 뒹굴어 생긴 것이며 실제로는 간수를 마시고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음란한 여자의 말과 행동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에 죽은 김 여인은 시장에서 술이나 파는 상것으로 아침에는 장씨의 여자였다가 저녁에는 이씨의 여자가 되는 그런 여자입니다. 신해년에 소위 그 남편이라는 김덕삼이 죽자 저와 서로 간통한 후 첩이 되어 내왕하였으니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김 여인의 살림살이는 모두 제가 갖추어 준 것입니다. 늘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약간 뜻이 맞지 않으면 술에 취해 패악을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정분은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올 6월 초 갑자기 싫어하는 기색이 보여 장차 관계를 끊으려나 보다 생각했으나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실은 김 여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 어머니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므로 수치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한 달 가까이 그 집에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6월20일 경 다시 왕래를 하였고 제가 애초에 김 여인을 버릴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달(8월) 보름쯤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으니 읍내에 사는 이세효라는 양반이 김 여인의 집에 들러 잠을 잔 후 첩으로 삼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제가 19일 장날에 가 보았더니 이세효와 조카 이정렬이 과연 와 있으므로 '분명히 다른 남자가 있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숙부와 조카가 일을 꾸며 작첩(作妾)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 어찌 양반의 도리란 말인가?'라고 이치를 들어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 여인이 대취하여 제게 오더니 욕설을 퍼붓고 이리저리 구르면서 술값을 갚지 않았다느니 등 만부당한 이야기를늘어놓으며 패악을 부렸습니다.
그 뜻을 헤아려 보면 무단으로 저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취한 것이므로 제가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교묘하고 사악한 마음으로 이런 짓을 한 것입니다. 제가 명색이 양반인데 장날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김 여인과 서로 시비할 수가 없어서 몇 마디 말로 책망한 후 술에 취해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지금 제가 구타하여 죽였다는 말은 천만 애매한 말입니다."
검안, 정상적 예외의 기록
그러나 김 여인을 검시한 결과 이봉진의 구타로 인한 죽음이 확인됐다. 이봉진은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도 사건을 조사한 관리들은 '부정한 여자', 즉 인륜을 저버린 여자를 응징한 남자에 대해 관대한 처벌을 고려했다. 결국 김씨 부인은 이봉진에게 구타 당해 한 번 죽었고, 여성에 강요된 정절이라는 사회적 폭력에 의해 두 번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번 사건은 시신의 상처가 낭자하고 구타의 사정이 밝게 드러났으므로 김 여인이 이봉진에게 맞아 죽었음을 다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김 여인이 본시 천한 여인으로 연로하여 의지할 데가 없자 스스로 이봉진의 첩이 되었고 서로 정의가 좋아 5년을 함께 지냈는데 갑자기 남편을 배신할 계책을 꾸미고, 술을 먹고 일부러 능욕하여 남편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봉진이 한 달 정도 발길을 끊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불러들여 여러 날 동침하고는 이웃 마을에 자랑하면서 버림받은 수치를 감추려고 하였으니 그 정상이 통악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실로 이봉진이 발분하여 구타한 것은 인정상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구타할 때 꼭 죽일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결국 불행히도 3일 안에 목숨을 잃어 옥사(獄事)가 성립한 것입니다.'
아마도 검안이 그려내는 조선 사회는 매우 이례적이고 특수할 가능성이 높다. 검안 기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의 진술은 과거가 특별하고 어두운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당시를 대표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을 때려 죽이고도 음란한 여자를 처벌했다고 주장하는 이봉진의 진술을 곱씹다 보면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조선 사회의 일상과 상식에 맞닥뜨리게 된다.
진술과 진술의 행간에서 엿볼 수 있는 당시의 사회상 그리고 삶은 분명 100여년 전 혹은 그 이전 향촌사회의 풍경이며 이를 무대로 살아간 민중의 모습이다. 그곳에는 국가로부터 그리고 향촌사회로부터 자신을 보호 받지 못한 채 폭력과 권력 앞에 노출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기록돼 있다. 여자 여럿을 거느리는 남자는 호방함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얻고, 생존을 위해 남자를 바꾼 여자는 음란하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됐다. 검안의 기록은 예외적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민중의 고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은 '정상적 예외'인 셈이다.
글 김 호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 살인사건 발생하면…
조선시대에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군현의 사또가 1차로 책임을 지고 조사한 후 1차 보고서(初檢)를 관찰사에게 보내고 곧 이어 인근 군현의 사또에게 2차 조사(覆檢)를 의뢰했다.
그러면 복검관은 초검 때와 동일하게 검시하고 관련자들을 심문한 후 복검 보고서를 관찰사에 보낸다. 관찰사는 두 건의 보고서를 대조한 후 조사과정에 의혹이 없으면 사건을 종결하고, 시체를 유족에게 내주어 매장하도록 한 후 두 건의 검안(檢案)을 정리하여 형조(刑曹)에 보고했다.
이 모든 과정은 '무원록(無寃錄)'이라는 법의학 지침서에 근거했다. 물론 조사 과정의 의혹이 있으면 3차 조사, 4차 조사 심지어 그 이상의 조사도 행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초검, 복검관과 그 이후의 조사관들이 합동으로 조사했다. 인명 사건 조사가 그만큼 엄격했던 것이다. 사건을 대충 조사하거나 뇌물 등을 받고 조작한 경우 후일 발각되기라도 하면 파직과 함께 엄벌에 처해졌다. 배천군수 이술원이 부리나케 현장으로 달려간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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