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일반 시사회가 끝난 후 한 젊은 관객이 말했다. "야, 안성기도 연기 잘 한다." "조용필 노래 잘 하더라"는 말처럼 생뚱맞은, 뒤늦은 사실 확인이다. 하지만 안성기(51)는 이제 젊은 관객들과는 그만큼 거리가 먼 배우다. "그게 좋잖아요. 배우는 그렇게 늘 새로운 관객과 만나야 하니까요."손바닥 뒤집듯 사람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쇼 비즈니스 업계지만 안성기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그가 그런 평가를 듣는 것은 스스로가 가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실미도'에서 안성기는 삶의 나락에 빠진 이들을 건져 올려 새로운 나락으로 빠뜨리기 위해 훈련시키는, 인간적인 동시에 악마적인 최재현 준위 역을 맡았다.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인간적 군인에 그보다 더 잘 어울릴 배우가 있을까?
"ROTC 출신이라서 제복이 잘 어울리나?" 그는 농담처럼 말을 시작했다. "영화 내내 차가운 모습만 보였다. 최 준위 역시 역사의 희생자였고, 그들과 계급만 다를 뿐 갇혀 있는 자였다. 세상의 많은 것이 다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연기력 못지않게 수준급인 몸을 드러낸다. "뛰는 장면이라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하긴 내가 벗으니까 후배들이 긴장하더라구. 특히 임원희가. 하하." 초등학교 시절부터 틈만 나면 철봉에 매달렸고, 기구 운동을 좋아한다는 그의 몸은 20대처럼 탄탄하다.
처음부터 스타였고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젊음도 가졌지만, 그는 여전히 꽁생원처럼 산다. 술 먹기보다는 집에 있기를 즐기고, 기름값이 많이 드는 차는 잘 몰고 다니지 않으며, 연기학원생도 두고 있다는 매니저 한 명 없다. 몇 년 전 그에게 '엄처시하라서 그런가'라고 묻자 "한때 그런 생각을 해 봤지만 따져 보니 그게 진짜 내 천성이더라"고 답했다.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냥 계속 이렇게 살지 뭐…."
아역 배우 시대를 빼고 1977년 조연으로 연기를 재개한 '병사와 아가씨들'부터 계산해도 그의 연기 인생은 벌써 26년이고 출연작도 70편에 이른다. '바람불어 좋은 날'로 시작해 '만다라' '꼬방동네 사람들' '고래사냥' '깊고 푸른밤' 등 80년대는 완벽히 그의 시대였다. 그런 시절을 보낸 그의 마음 속은 늘 떠나지 않는 그의 미소처럼 고요하고 맑기만 할까. "에이, 나도 사람인데. 이를테면 '살인의 추억'이나 '올드보이'를 보면 '자식들 참 잘하네, 나도 저런 거 했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킬리만자로' 같은 영화에서 그는 '아름다운 조연'이 되는 길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미도'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이제 다시 '안성기의 영화'가 많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을 준다. "배우의 정년이 언제인지 한 번 가봐야겠다는 심정"이라는 말에서 부드러운 미소 뒤에 감춰진 결의가 엿보였다. 그가 나이 먹는 모습은 날로 아름답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내가 본 안성기
"그 사람은 재주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삶이 연기에 고스란히 투영되는 그런 배우다. 안에 거짓이 없는 게 화면에 다 드러난다. '만다라'부터 '취화선'까지 여러 작업을 하면서 가장 믿음직한 배우였다. 나한텐 보배다."
―임권택 감독
"사람이 좋아서 오래 정상에 머문다? 천만의 말씀. 사람은 편하지만 결코 편하게 연기하지 않는다. 지독한 노력파다. 형수님께서 '집에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하더라. 그가 톱스타인 것은 근성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
"엄청난 카리스마적 배우!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넉넉함 때문에 그릇의 크기 조차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카리스마를 가졌다. 그의 모범적 사생활과 성실함은 차라리 두번째 매력으로 미루고 싶다."
―배우 박중훈
● 영화 "실미도"는…
1970년대 간첩이 잡힐 때마다 사람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 "우리나라도 북한에 간첩을 보낸대." "범죄자들을 모아 군대도 만들었대."
그러나 그런 소문의 실체는 한 번도 신문에 나지 않았다. 71년 8월23일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 버스를 타고 나타난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지만, 진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화 '실미도'는 김신조 사건에 대응, 인천 부근 실미도에 만든 북파특수부대인 '684주석궁 폭파부대'의 설립에서 대방동 사건까지를 다룬다. 감추려 했던 역사의 기록이자, 역사의 현장 검증이다.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살인미수로 사형을 선고 받은 강인찬(설경구) 등 이 사회에서 '쓰레기'로 분류된 31명은 살아 남기 위해, 김일성의 '모가지를 딴 후 떳떳하게 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살인기계가 되어간다.
강우석 감독은 정공법으로 역사의 복원을 시도했다. 영화에서 훈련 도중 사망한 병사를 한 명(실제로는 7명)만 보여준 것은 잔혹한 훈련이 주는 감각적 자극보다는 사람을 재물로 삼는 정치논리와 인간의 갈등에 무게중심을 두려는 시도로 보인다.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되자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부대원을 죽이라는 정치권의 압력과 최재현 준위(안성기)의 갈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그렇다.
무게중심이 다른 곳에 있으니, 인간의 갈등을 섬세한 터치로 잡아내는 감독의 매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던 박 중사(이정헌)가 '사는 문제'를 앞두고 악바리 조 중사(허진호)보다 더 악질로 변하는 대목을 제외하고는 훈련병 내부, 훈련병과 기간병의 갈등이 그리 신랄하지 않다. 기계적으로 평등한 카메라는 안이해 보인다. 적대적인 두 캐릭터를 영화 안에서 마음껏 '갖고 놀던'('투캅스'에서 '공공의 적'까지) 능란한 연출력이 역사와 정치 논리를 상대하면서는 몸 놀림이 유연하지 못하다. 설경구 정재영 강신일 등 많은 훈련병에게 골고루 시선을 보내다 보니 '영웅적'으로 돋보이는 캐릭터와 배우는 없다. 상업적 노림수가 약해 보인다는 뜻이다.
감독은 "평론가보다는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는데 순제작비 80여억원이 든 블록버스터의 소박한 진심에 대중이 어떻게 화답할지. 24일 개봉.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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