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정부의 대량살상무기(WMD) 폐기 및 국제사찰단 수용 선언은 수 십 년 간 계속된 미국과 유엔의 제재로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진 데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진다.무아마르 가다피 국가원수는 이 때문에 수년 전부터 자신의 표상과도 같은 극단적인 아랍민족주의를 포기하고 서방과의 타협을 모색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19일 WMD 포기를 전격 발표하는 모양세를 취했지만 실제는 9·11 테러 이후 2년 여에 걸쳐 영국 정부를 파트너로 협상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20일 리비아의 WMD 포기선언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리비아 정부가 3월 로커비 사건 배상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WMD 문제도 유사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타진해 왔다"고 밝혔다.
선제공격을 해서라도 WMD의 확산을 막겠다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대 테러의지도 한 몫 했다. 특히 사담 후세인 생포 이후 현실로 다가온 정권 붕괴에 대한 가다피의 위기감이 미국에 대한 투항을 가속화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으로부터 축출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리비아 정부가 WMD 포기를 선언했다"고 한 가다피의 아들 시이프 알 이슬람 가다피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후세인의 생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라크에서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군사력이 아닌 외교력으로 미국의 잠재적 위협을 하나 더 제거했다는 점에서 내년 대선가도에 청신호가 될 전망이다.
반 서방노선으로 악명 높은 가다피가 유화적으로 돌아선 징후는 최근 여러 곳에서 감지돼 왔다. 가혹한 경제제재를 초래한 1988년 팬암 항공기 및 이듬해 프랑스 UTA 항공기 폭파사건의 책임을 인정하고 팬암기 유족들에게 27억 달러(3조 2,0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의 지급을 약속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발생한 이슬람 무장단체의 잇단 서방인 인질사건에서도 중재자로 나서 사건을 원만히 해결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리비아가 이로써 국제 사회에 재가입하게 됐다"고 평가한 뒤 "다른 나라 지도자들도 리비아의 모범을 따르기를 희망한다"고 당부했다.
아랍권은 리비아의 WMD 포기선언을 계기로 다른 역내 국가들도 리비아의 선례를 따라야 한다는 '뼈 있는' 주문을 했다.
아므르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에 대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며 서방의 편향적인 대 이스라엘 정책을 비난했다.
이번 WMD 포기선언으로 리비아는 미국의 경제 제재 해제를 포함한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리비아는 로커비 사건 배상결정으로 9월 유엔의 경제제재에서는 벗어났으나 미국으로부터는 여전히 테러지원국으로 지목 받으며 경제봉쇄를 받고 있는 상태다.
미국은 자국기업의 리비아 상품 거래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리비아에 연간 2,000만 달러 이상을 지급하는 외국기업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하고 있어 리비아의 대외교역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 가다피는 누구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리비아를 34년 동안 철권통치해 온 무아마르 가다피(61) 국가 원수에게는 '독불장군','과대망상증 환자', '변덕쟁이' 등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서방은 1984년 영국 경찰 총격 살해 86년 독일 베를린 나이트클럽 폭파사건 88년 미국 팬암기 폭파사건 89년 프랑스 UTA 항공기 폭파사건 등을 배후 조종하고, 아일랜드공화군(IRA),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등 전세계 무장단체를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가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라고까지 불렀다.
가다피의 극단적인 반(反) 서방, 반 유대 정책은 아랍권에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아랍연맹 탈퇴 선언과 번복을 되풀이하고, 역내의 친서방 국가들에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그는 아랍권의 이미지를 갉아 먹는 골칫덩이일 뿐이었다. 반면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가다피는 아랍의 유목민족인 베두인족 출신으로, 14살 때부터 반 외세 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리비아를 지구상에서 가장 자주적인 나라로 만들겠다"는 이념으로 군에 들어가 69년 쿠데타로 국왕을 몰아냈다. 그는 권좌에 오른 직후 리비아를 '대중의 공화국'이라고 명명하고, 자신의 직함을 '혁명의 수호자'로 정했다.
가다피는 73년부터 '문화혁명'을 추진, 외국 서적을 모조리 불태우는 등 극단적인 반 외세 정책을 폈다. 77년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 아랍민족주의를 혼합한 독특한 정치철학을 세권짜리 '그린북'에 집대성해 사실상의 헌법으로 삼았다. 같은 해 선거를 통해 의회격의 '전인민회의'를 조직해 통치를 맡게 했지만 사실상 가다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모든 국가 권력은 가다피 한 사람이 쥐고 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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