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 표출하는 지배적 관심사만큼 그 시대상(像)을 잘 말해주는 것도 없다. 확신과 믿음 그리고 역동성이 넘치는 시대에는 민중들 사이에 비웃음과 불용(不容)의 말 따위가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그 반대의 시대에는 자조와 역설적 표현들이 시중에 횡행한다. 은어와 비어, 금서가 그것이다.과거 권위주의 시대 김지하의 '오적'(五賊) 등 이른바 불온서적들은 군사독재와 반민주에 저항하는 민중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혁명 때 그들 국민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행동하게 한 힘의 뿌리를 파보면 거기에도 금서가 있었다.
예컨대, '뒤발리 백작 부인의 일화' 같은 금서가 '낮은 신분 때문에 궁정과 그 영화에 접근하는 길을 빼앗긴 소박한 시민'들의 혁명의식을 부추겼던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지도자라면 시중에 퍼져있는 역설과 자조를 정확하게 판독하고 그에 대응해야 한다.그것이 나라경영자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참여정부 출범 1년이 다가오는 지금,우리 국민의 지배적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가.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개혁구호에 있을까.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개혁의 당위성에 동의하면서도 정부와 정치권의 개혁방향과 역량에 거의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소수여당의 한계니, 구질서 파괴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이니 하기에는 참여정부의 장래에 대한 뚜렷한 믿음이 서지 않는다. 경제성장률 추락과 불안정성 때문만은 아니다.문화의 지체와 자아상실 위기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최근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우왕좌왕'(右往左往)처럼, 나라의 정책이 불확실성과 불신을 야기했기 때문이다.국민들은 '잃어버린 지난 1년' 동안에 오히려 아노미적 혼란에 휩싸였는지도 모른다.
우왕좌왕하며 실종된 개혁의 사례는 광범위하다. 참여정부 출범 후 화물연대 강경투쟁 방치 등 노동정책의 난맥,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둘러싼 갈등조정의 실패 등 교육정책의 표류,새만금간척사업과 부안방폐장 등 국책사업을 둘러싼 갈등….
자유와 정의의 지킴이인 법조계와 나라의 근간인 공직사회의 부조리와 부정합성(不整合性) 등이 엘리트계층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말의 기대마저 무산시켰다.
증여세 포탈로 논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가성 유무로만 판단했던 불법정치자금에 대한 재판, 검사가 허위문서를 작성하고도 할말이 있다고 주장하는 억지, 불법과세한 세무공무원이 승승장구하는 역설, 외교관의 부정비자발급 수뢰와 관행적 예산유용, 병영의 하극상과 부정축재 장군 등이 그것이다.
정치권의 부정백태와 몰염치의 점입가경은 잃어버린 1년의 슬픈 단상을 증폭시킨다.'차떼기'와 '책포장' 등 기막힌 아이디어를 동원해 막대한 불법정치자금을 챙기고서도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물귀신 술수를 보이는 정치권, 측근 비리가 터져 나오는데도 부정의 규모가 상대당의 10분의1이 안된다는 '비교우위'로 사면을 바라는 두꺼운 얼굴, 지도층의 이런 모습들이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확신과 희망은커녕 냉소와 좌절을 심어준 것이다.
새해에는 정치,행정,사법의 수장, 특히 대통령은 노자(老子)가 도덕경에서 말한 '네 가지 군주 중 가장 훌륭한 군주'인 '백성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군주'가 되기를 바란다.하루가 멀다 하고 흥분과 쟁점을 불러일으키는 '참을 수 없는 다변의 가벼움'과 '민생을 외면하는 이전투구의 정쟁'으로는 결코 내일을 약속 받을 수 없다.과거의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국가와 국민에게는 희망이 없다.잃어버린 1년이 내년에는 제발 생동감 넘치는 한해로 바뀌기를 바란다.
전 철 환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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