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한국 사회는 자살 광풍(狂風)으로 휘청거렸다. 대기업 회장, 초등학교 교장, 노조위원장, 고3 여고생에서부터 일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로 자살을 택한 이들이 지난 1년간 1만3,000명을 넘었다.전문가들은 "탈출구 없는 삶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자살 사건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의 치부가 그대로 응축돼 있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며 항변하는 안타까운 일이 되풀이됐다. 새해 벽두인 1월9일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회사측의 월급 가압류, 손해배상소송 등에 항의해 자살하면서 시작된 노·사·정 갈등은 이후 35m 높이의 타워크레인에서 농성하던 부산 한진중공업 김주익 위원장이 농성 129일 만인 10월7일 목숨을 끊으면서 절정을 이뤘다.
또 11월에는 정부의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추방 조치에 항의하며 우즈베키스탄인 브르혼씨를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잇따라 머나먼 이국에서 스스로 한 맺힌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교육, 농업 등 사회의 근간이 되는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간제 여교사 차 시중 문제로 전교조와 갈등을 빚다 4월4일 목숨을 끊은 충남 예산군 보성초등학교 서승목 교장 자살사건은 교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 수능시험일과 시험성적 발표일에 시험성적 때문에 목숨을 끊은 여고생들의 사연도 안타까움을 더했다. 9월11일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리고 있던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전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이 농업분야 개방에 항의하며 할복 자살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일련의 자살 사건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사회에 내포된 모순과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8월4일 새벽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내 집무실에서 투신 자살한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부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함께 금강산 개발 등 대북사업에 앞장섰고, 그 과정에서 불거진 대북 송금과 비자금 문제 등으로 특별검사에 이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정 회장의 죽음은 이후 대북지원 사업에 대한 논란과 함께 현대엘리베이터 및 KCC간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서민들의 잇딴 가족 단위 동반자살이었다. 인천 아파트에서 30대 주부가 생활고를 비관해 세 자녀와 함께 투신자살했고, 경남 밀양의 한 여관에서는 빚 독촉에 시달리던 일가족 6명이 음독자살했다. 김호기 교수는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 사회가 부를 기준으로 양극화하면서 약자들에게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이 다가왔고 이들은 죽음으로 문제를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급기야 자살을 '사회적 타살' 차원에서 접근하고 예방하기 위한 사회원로 중심의 한국자살예방협회까지 설립됐다. 이홍식 회장(연세대 의대 교수)은 "카드빚, 실직, 가치관 붕괴 등 사회상황 때문에 발생하는 자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하루속히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고 국가 차원의 자살 예방대책을 내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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