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시대의 남쪽 바다는 일본 본토까지 아우르는 호수였다고 한다. 그 거대한 호수는 판게아(대륙분화 이전의 땅덩어리)에서 갓 분리된 유라시아대륙의 한 귀퉁이에도 닿아, 민물이 짠물이 되던 그 수십억 년 동안 쉼 없는 생명의 출렁임을 이어온 것인데, 그 곳을 주민들은 자란만(紫蘭灣)이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으로 치자면 경남 고성군 500리 해안선의 일부로, 갯가 층암단애의 풍광으로 보나 물의 청정도로 보나 무엇 하나 빠질 데 없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다. 그 바닷가 중생대 백악기 지층의 너럭바위 위에서 공룡들의 족적을 확인한 게 서기 1982년, 공룡 서기로 치면 약 2억3,000만년 만이었다.인간의 머리에서 그쯤 되는 세월이면 과학과 공상의 영역의 경계조차 모호해진다. 호숫가 늪지대를 목 마른 공룡들이 걸었고, 그 위에 진흙이며 모래가 층층이 퇴적돼 발자국 지층을 화석화 했을 것이고, 다시 맨틀 에너지가 변덕을 부려 발자국 지층을 융기시키자, 물과 바람이 위에 덮인 허접한 지층들을 침식해서 드디어 공룡 발자국 화석이 드러난 것일 터.
그 복잡한 필연의 인과를 종교에서는 '인연'이라고 뭉뚱그린다. 그러니, 어쩌면 공룡들이 멸절한 중생대 마지막 지질시대인 백악기(1억4,300만∼6,500만년전) 최후의 공룡들의 흔적일 지도 모르는, 고성 상족암의 발자국은 겁(劫)의 세월을 넘어선 인연의 증표라고 우겨도 좋을 것이다. 그 두터운 인연을 믿고, 중소도시 동(洞) 단위에도 못 미치는 5만8,000 군민들이 공룡 국제엑스포(2006.4.14∼6.4)를 치러내겠다고 덤벼들었다.
18일 오전 하이면 상족암 군립공원. 40여 명의 고성읍 자치회 주민들이 모였다. 바닷바람이 매섭지만 안내자의 설명을 듣는 열의들은 무던하다. 박람회 행사 기간동안 연 인원 150만 명의 손님이 온다니 전 군민이 홍보·안내요원으로 나서도 부족할 판. 여차하면 농사며 어업이며 생업도 잠시 접고 엑스포 자원봉사자로 나서겠다는 의지로, 읍을 시작으로 14개 읍·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고성군 일대 공룡 발자국 화석은 7㎝길이의 작은 것에서부터 1.2m에 이르는 거대한 초식공룡의 그것에 이르기 까지 약 1만개(학계보고 5,000여 개)가 두루 발견된다. 해서, 2000년 국제 학술대회때 국내·외 학자들이 미국 콜로라도와 아르헨티나 서부해안에 이은 세계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공인하고, 그 자연사적 가치를 인정했던 것인데, 아직 그 같은 위상을 아는 이는 국내에도 많지 않다.
군은 2000년 여름부터 전국 234개 지자체가 너나없이 해오고 있는 고만고만한 축제를 열어왔다. 이름하여 '고성 공룡나라 축제'다. 그런데 그게 축제때만 되면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부는 바람에 모양이 우스웠다고 한다. "닷새 축제하모 나흘은 하늘이 안도와 주는 기라. 환장하겄데." 지난 해에는 결국 국가 지정축제 대열에서도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래? 하는 김에 제대로 함 해보자." 그렇게 덤벼 든 게 국제 엑스포였다. 곧 바로 타당성 조사 용역을 발주했고, 연말께 나온 자료와 계획의 대강을 들고 경남도와 국무조정실, 문화관광부 등 부처 담당자들을 찾아 다니며 협의를 시작했다. 말이 좋아 '협의'지, 문화부 지정 축제에도 '함량 미달'로 찍힌 행사를 키워서, 그것도 군 단위로서는 유래가 없는 국제 엑스포로 치르겠다며 예산을 내놓으라는 것이니 오죽했을까. "고성 카모 산불 났던 강원도 고성으로 알지 여기를 누가 압니꺼. 말들은 안했지만, 다들 '미친놈 아이가'하는 눈초립디다." 실무책임자인 김용화 기획팀장은, 도청에도 일년에 한 두 번 갈까 말까 하던 군 직원들이 한 달이면 보름씩 서울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담당자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프로그램이며 숙박이며 교통이며 챙겨야 할 일이 한 두 가지던가. 상급기관 담당자가 전화라도 걸어 이것 저것 물어주면 그 길로 심야버스 타고 상경해 출근시간에 맞춰 청사에서 기다리다 부연 설명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니, 그것도 무려 12개 부처에 걸쳐 진행된 일이었다니, 혀를 내두를 일이다. 기획팀 인원은 고작 4명이었다.
처음에는 군민들도 시큰둥했다. "군비 쪼매 있는 거 갖고 농로나 닦고, 농기계 보조나 한 푼 더 주지 공룡은 무신 공룡이고." 주민 절반이 농민이고 어민이다. 어릴 적부터 갯바위 여기저기 심상찮은 구덩이들이 보였어도 지나는 말에 '소가 똥을 싸면서 지나간 자리'라고도 했고 '도사가 지팡이 짚고 간 자리'라고도 했지만 그러려니 했을 뿐, 주린 살림에 감성 돔이나 많이 잡히고 굴 양식이나 잘 되면 됐기 때문이다.
고성군은 주민 설득하랴 중앙부처 쫓아다니는 틈틈이 캐나다와 일본 중국 미국 등 4개국을 돌며 현지 공룡박물관과 소장품 교환전시 및 행사 참관, 학술세미나 공동개최 협약을 체결했다. 3억원을 들여 꾸민 공룡나라 '사이버테마파크'가 정보통신부의 '2003 청소년 권장사이트' 1위에 뽑혔고, 행정자치부와 문화부에서 정한 우수 사이트에 선정되기도 했다. 공무원들의 열정과 공룡발자국 화석군의 희소가치를 인정한 것인지, 국무조정실과 행자부는 지난 8월과 10월, 각각 국제행사 개최 및 지방 재정투융자 사업을 승인했다. 군은 총 예산 320억원 가운데 첫 해 정부 예산 41억원을 타내는 등 군 출범이래 유례가 없는 특별 예산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주 행사장으로 쓰일 당항포 관광지에는 기존의 자연사박물관과 연계한 공룡 관련 위락시설을 유치하고, 상족암 특별행사장에는 전시관과 함께 현장체험 탐방로를 조성할 참이다. 국제 전시·학술·문화 행사며 체험·오락 프로그램이며 국제 화석광물페어 등의 엑스포 단골 메뉴야 물론이고, 전 세계인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몇 건의 비밀 이벤트도 추진하겠다는 야심이다.
군내에서도 후미진 동네로 꼽힌 개천면 좌연리의 한 할머니와의 대화.
―할머니, 공룡 엑스포 한다면서요?
"2006년이다. 아직 멀었다."
―공룡도 없이 무슨 엑스포를 한답니까?
"와 없어? 천지다."
할머니는 턱으로 마을 공동창고에 그려놓은 한 쌍의 브라키오사우르스 벽화를 가리키며 당당하게 웃었다. 설마 했던 국제 잔치를 동네에서 치르게 되면서, 그 자신감은 군민들에게도 서서히 번져가는 듯 했다.
/고성=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 이학렬 고성군수
"공룡이 알을 깝니꺼, 새끼를 낳십니꺼. 그 간판 치우고 고성 수박 사진이나 하나 걸어 놓읍시더."
지난 해 7월 취임한 이학렬(52) 고성군수가 마을을 초도순시한 자리에서 한 주민이 던진 말이다. 진입로마다 세워 둔 '공룡나라 고성' 입간판을 시비삼은 것. "그 자리에서 마음을 다잡았십니더. '아, 우리 공룡이 황금알을 낳는 걸 보여드려야겠구나'라고요." 농촌이 농사만 지어서는 버틸 수 없고, 어민이 고기만 잡아서는 못사는 세상인 탓도 있고, 미국이며 일본 등지의 고생물학계 석학들이 고성을 찾아와 '마블러스(놀랍다)'를 외쳐대는 판이니 공룡을 두고 다른 무엇으로 지역 테마를 삼겠느냐는 판단에서다.
그는 능력보다 열정을 먼저 주문했다고 한다.
주관 업무의 최상·하급기관 담당자와 인간적으로 친해지라는 것도 그 같은 열정행정의 지침 가운데 하나. 지방화시대라고 하지만 열악한 재정환경에 하나부터 열까지 도며 중앙 정부와 협의하지 않고는 안되는 시스템이고, 일을 하자면 면·이장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겠기 때문이었다. "공문 달랑 한 장 보내는 것과, 직접 찾아가서 악수라도 한 번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아닙니까." 이 군수는 "모두 고개를 젓던 공룡 국제엑스포를 따낸 것도 그 같은 열정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 열정으로 고성이 엑스포의 내용을 채워나가고 있다. "이제 시작입니더. 함 해보께요. 공룡이 얼마나 멋진 알을 낳는 지 두고 보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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