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정치자금 논란의 당사자들이 잇달아 기자회견을 가졌다. 15, 16, 17, 18일에 걸쳐 차례로 이루어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노무현 대통령,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의 회견 내용은 한결같이 실망스럽다.이회창씨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가겠다. 대리인들만 처벌 받고 최종책임자는 뒤에 숨는 풍토에서는 결코 어두운 과거가 청산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회창을 밟고 지나가서라도 한나라당이 거듭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회견을 마치고 검찰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요즘 정치판에서 보기 힘든 깨끗한 처신이었다. 그러나 '피의자'로서 몸을 낮추기 보다는 비장한 결단으로 노 대통령을 압박하려는 계산이 드러난다. "밟고 지나가라"는 대목은 영웅적이기까지 하다. '차떼기' 등에 쏟아지는 비난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다.
노 대통령의 회견은 더 실망스럽다. 그는 "누가 더 썩었느냐.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쪽 불법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최근 발언의 진의가 왜곡돼 유감스럽다면서도 그 발언을 취소하는 대신 거듭 밀고 나갔다.
19일 밤 대통령 당선 1주년을 축하하는 노사모 행사에 참석한 그는 '2급수론'으로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심하게 썩은 3급수 4급수에 비해 자신들은 약간 오염된 2급수이므로 정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불법자금의 본질은 외면한 채 자금규모나 오염정도를 강조하여 차별화하겠다는 집념이다.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기업과 정치권의 직접적인 정치자금 제공 금지, 지정기탁금제 부활 등을 촉구하고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앞으로 정치자금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법인세 1%를 정치자금화하자는 안에 반대했다.
정치 지도자들 못지않게 전경련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다. 현 부회장은 "재계도 이젠 정치자금을 내는 실익이 있어야 한다. 기업의 정치자금 제공은 사회공헌 활동이 아니라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자율적 임의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지정기탁금제가 없으면 반기업적인 정당에도 돈이 가는데 왜 내겠는가"라고 말했다.
기업의 정치자금 제공은 사회공헌 활동이 아니며, 기업에도 실익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게 한다. 정경유착이라는 실익을 기대하며 거액 불법자금을 제공해 온 과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정치부패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재계가 새삼 교과서적 원론을 내세우며 "한푼도 못 내겠다"느니 '최후통첩'이니 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제발 내년 총선에서부터 한푼도 못 내겠다는 최후통첩을 지켜주기 바란다. 그러면 저절로 돈 안 쓰는 선거가 될 것이다. '돈 주고 뺨 맞는' 재계의 억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점이 드러나 폐지된 지정기탁금제도의 부활을 이 시점에서 요구하는 것은 너무 속이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게이단렌(經團連)을 참고로 할 만하다. 내년부터 정치헌금을 재개하기로 한 게이단렌은 "기업은 정치기부를 기업의 사회적 공헌으로 인식하고 정책위주의 정치를 지향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헌금대상은 모든 정당으로 하되 정치기부에 찬성하지 않는 정당은 제외하기로 함에 따라 공산당을 제외하고 있다.
기업이 사회적 공헌으로 정치자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전경련의 주장은 옳지 않다. 기업은 모든 계층 모든 이익집단을 가리지 않고 상품을 팔아 돈을 벌고 있다. 입맛에 맞는 정당에 선별적으로 돈을 주겠다는 것은 물건을 파는 자의 윤리에 어긋난다. 기업은 정치자금을 제공함으로써 이 나라 정치발전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다.
불법정치자금 논란의 당사자들, 심지어는 피의자들까지 말이 많은 것은 죄의식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2급수'를 3급수 4급수와 같이 취급한다고 억울해 하고, 야당은 내심 정치보복을 당하고 있다고 억울해 하고, 기업들은 돈 주고 뺨 맞는다고 억울해 하고 있다.
모두가 억울하니 정치개혁이 되겠는가. 피의자들은 입을 다물고 본질을 봐야 한다. 이것은 정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임을 인식해야 한다.
/본사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