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4개월 된 우리 아기는 치직거리는 TV 빈 채널의 잡음을 들려주면 잠을 잘 잡니다. 엄마 목소리보다 잡음을 더 좋아하는 것 같으니 도대체 이유가 뭐죠?"소리공학자인 배명진(숭실대 정보통신전자공학부) 교수가 자궁 속에서 태아가 어떤 소리를 듣고 자라는지 그 비밀을 파헤쳤다. 2년 전 6개월 미만의 아이를 둔 엄마들로부터 TV 잡음, 세탁기나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소리,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 전기면도기를 쓸 때 나는 소리 등을 들려주었을 때 아이가 좋아하거나 울음을 그친다는 등의 경험담을 들은 후부터 배 교수는 이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최근 배 교수는 자궁에서 가장 잘 들리는 소리가 임신부의 배를 쓰다듬거나 옷이 스칠 때 나는 소리이고, 그것이 TV의 잡음과 비슷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배 교수는 양수검사를 하는 임신부의 뱃속에 내시경 마이크를 삽입, 녹음했다. 예상과 달리 엄마의 심장박동소리나 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고 임신부의 내장이나 근육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와 임신부의 배를 스치는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던 것.
배 교수는 "자궁 외부의 소리는 물(양수)에서 더 크게 전달되지만 임신부의 뱃가죽에서 흡수돼 실제 태아는 저음 위주의 소리만 듣게 된다"며 "대신 배의 피부를 스치는 소리는 귀 가까이에서 크게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TV, 세탁기, 청소기 등의 잡음은 배를 쓰다듬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음향학적으로 소리의 색깔이 없는 '백색잡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엄마가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를 자주 쓰다듬으면 아이가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외부 환경에 처음 노출된 백지상태의 존재로 보이지만 사실은 자궁의 기억을 갖고 있다. 뇌가 성숙하는 임신 6개월 이후부터 태아는 오감을 모두 느낀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예컨대 임신 6개월부터 태아는 엄마의 배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빛을 감지한다. 임신부의 복부에 강한 빛을 쪼이면 태아가 꿈틀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너무 자극적인 빛은 태아에게 스트레스를 주게된다. 수술실용 램프의 자극적 빛을 피해 자연광에서 아이를 낳도록 하는 르부아이에 분만법도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다.
후각은 태어난 직후 더 민감하고 자랄수록 약해진다. 에스토니아 탈루대학병원 소아과 바렌디 교수가 유럽 소아과학술지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신생아는 자궁 속 양수의 냄새를 기억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엄마의 젖꼭지 중 한쪽에만 양수를 묻혀놓으면 77∼90%가 양수 묻은 젖꼭지를 찾아 문다는 것. 하지만 사람의 후각은 태어난 지 1주일만 지나면 오히려 퇴화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의 300∼500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자궁 속에서 음식을 직접 먹지는 않지만 임신부에게 포도당을 투여했을 때 태아의 움직임과 심박동이 증가한다는 연구도 대한산부인과학회지에 발표됐다. 생리식염수를 투여한 경우엔 큰 변화가 없어 태아도 간접적인 미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아에게 가장 지배적인 감각은 역시 청각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자궁 안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보금자리'가 아니라 다양한 소리가 들리는 번잡한 환경이다. 사람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잘 들리는 것은 역시 임신부의 목소리이며, 이밖에 외부인의 목소리 중에선 주파수가 낮은 소리, 즉 남자의 목소리가 주파수가 높은 여자 목소리보다 잘 들린다는 것이 확인됐다. 뱃속의 아기에게 엄마 아빠가 말을 많이 걸어준 경우 신생아들이 부모의 목소리에 반응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의 목소리는 뇌 발달과 발육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한양대병원 산부인과 박문일 교수는 체중 1.2㎏의 조산아에게 부모의 목소리를 녹음해 인큐베이터에 틀어준 결과 아기의 체중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해 평균보다 2주일 일찍 건강하게 퇴원한 사례를 경험했다. 체중이 1.5㎏ 이하의 미숙아는 체중 2.5㎏인 아이보다 뇌성마비 정신박약증 등 신경정신학적 장애가 나타날 가능성이 20배나 높은 등 생존확률이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뱃속 열 달의 가르침이 스승이 십년을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전통 태교의 가르침이 과학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 태교 어떻게
수년 전 세계적 과학저널인 '네이처'에 아이의 지능(IQ)은 유전보다 자궁 내 환경이 더 결정적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이후 태교 상품은 임신부의 마음을 편히 하는 음악이나 명상, 나아가 아이의 머리를 좋게 하는 IQ 상품 등으로 다양해졌다.
'모차르트 이펙트'(모차르트의 음악이 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를 이용한 음반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뱃속의 소리를 듣거나 태아에게 말을 들려주는 제품, 체조 동화 음악 명화 명상에세이 등을 프로그램화한 태교상품, 임신부 자신의 뇌를 자극하는 손뜨개 태교방법까지 선보였다. 산부인과도 태아의 얼굴 윤곽까지 생생하게 보이는 3D 초음파 영상을 비디오 테이프에 담아주거나 태중 소리를 녹음해 주는 등 태아와 부모의 친밀감을 돈독히 하는데 한몫 하고 있다.
하지만 한양대병원 박문일 교수는 "태교의 방법론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태교에 임하는 자세"라고 조언한다. 뱃속에서부터 똑똑한 아이 만들기에 너무 욕심을 내다보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좋은 음악을 듣는 것도 임신부의 정서를 편안히 해주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며 이 때 태아의 뇌를 비롯한 모든 발육이 잘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임신부에게 뇌의 알파파를 생성케 하는 음향과 자연음향(시냇물 파도소리 등)을 들려주고 태아의 심박동을 측정, 임신부가 편안한 마음상태에서 태아의 발육이 촉진된다는 것을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는 원인 불명의 습관성 유산에 대해서도 태아를 사랑하고 임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치료(tender loving care)만으로도 3분의2는 해결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최근 산부인과 의사들이 권하는 것은 임신부의 활동량과 식사량을 평소와 비슷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임신부와 태아의 체중이 너무 늘지 않아야 분만이 수월해지고 산후 산모의 건강에도 좋다. 임신부의 체중 증가량에 대한 산부인과의 지침은 12㎏이지만 9∼10㎏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운동을 적극 권유하는 의사들도 있다.
또 현대사회의 태교는 임신부만의 것이 아닌 사회적 태교여야 한다. 박 교수는 "임신부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사회적 태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기의 아빠, 시댁 가족, 임신부의 직장 동료가 '우리 사회의 2세를 건강하게 태어나도록 하는 데 동참한다'는 생각으로 스트레스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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