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만 빼고 모두 다 바꿨다'. 2004년 1월9일부터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될 박정자의 '19 그리고 80'에는 분명 이런 카피가 어울릴 듯하다. 올해 초 연출가 장두이가 무대에 올린 '19 그리고 80'과는 연출, 상대 남자 배우, 스태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연극 배우 박정자(62)씨가 주인공인 엉뚱하고 귀여운 여든 살 할머니 모드 역을 맡았다는 것만 바뀌지 않는다.'19 그리고 80'은 19세 소년 헤롤드와 80세 할머니 모드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 헤롤드는 엄마와의 갈등, 신(神)의 존재에 대한 회의 등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생의 꿈이자 취미로 삼으려고 하는 문제적 소년이다. 그런 헤롤드가 우주비행사를 꿈꾸고 동물원에서 물개를 탈출시킬 정도로 엉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의 지혜를 깨우친 모드와의 사랑에 빠진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 박씨의 연기력에 힘입어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자신의 80세 생일날 헤롤드의 프로포즈를 뒤로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드 역은 맞춤옷처럼 그에게 잘 어울린다. '시작이 종말이요, 종말이 시작이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린 이미 죽는 거야'(모드) 등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원작자 콜린 히긴즈의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력도 빛난다.
"가능하다면 제 실제 나이가 여든이 될 때까지 이 작품을 계속하고 싶어요." '19 그리고 80'의 제작까지 떠맡은 박씨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연기 인생 40년을 정리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그는 연출가와 출연진 스태프를 바꿔가며 '19 그리고 80'을 매년 새롭게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그의 첫 번째 시도라 할 수 있는 2004년 버전 '19 그리고 80'의 연출은 극단 물리의 대표인 한태숙씨가 맡았다. '에쿠우스' '레이디 맥베스' '서안화차'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력을 인정 받은 그는 "이 작품은 밝고 코믹하지만 그 안에 사랑과 삶의 본질이 담겨있다"고 평했다. 한편 전직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인 박웅씨가 코믹한 신부 역을 맡아 점잖은 신사 같은 자신의 이미지와는 딴판인 연기를 보여준다. 이밖에 중견배우 손봉숙, 최홍일 등이 가세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02)765―5476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헤롤드役 김영민씨
"사랑이요? 솔직히 그게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2004년 버전 '19 그리고 80'의 헤롤드 역을 맡아 여든 살 할머니 모드와 사랑에 빠지는 소년을 연기하는 김영민은 사랑에 대해 불가지론을 폈다. 그는 해맑은 소년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일까 세상에 상처 받고 자신의 내면으로만 끊임없이 침잠하는, 열 아홉 살 헤롤드 역이 그에게는 썩 잘 어울려 보인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 1대 헤롤드 역은 뮤지컬 배우 이종혁에게 양보해야 했지만 올 초 '19 그리고 80'의 공연을 앞두고 헤롤드 역 1순위로 꼽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김영민의 실제 나이를 알고 보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71년생, 그러니까 벌써 서른 셋이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연기력도 갖춘 그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소년 역을 왕왕 소화해 왔다. 연극 '로베르토 주코'에서 그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소년이었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는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열망으로 가득한 열일곱 살의 승려였다.
"그 동안 콤플렉스에 시달린 적도 있죠. 특정한 역할만 자꾸 주어지니까요. 하지만 연기자란 스스로 껍질을 벗어 던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 같아요."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바로 한태숙씨가 이끄는 극단 물리에 몸 담아 연극 배우의 길을 걸어온 그는 진지했다.
김영민은 자신과 헤롤드의 닮은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헤롤드처럼 열 아홉 살 때 '신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 죽음은 무엇일까?'하는 근원적 질문으로 방황한 적이 있어요. 저라도 그 질문에 힌트를 준 모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김대성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