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창조라는 말을 들어보았는지? 집단창조라고 하면 무슨 공산권 국가에서 횡행하는 예술 이론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집단창조는 연극을 만들 때 연출가와 배우, 그리고 관객이 '제각각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엇이 될고하니'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고' '피의 결혼' 그리고 '햄릿'. 극단 자유가 '집단창조' 작업으로 15년 넘게 해온 작품들이다. 78년 그 첫 작품 '무엇이 될고하니'는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이 객석과 무대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관객과 교통하는, 관객을 좀더 연극 속에 끌어들이고 참여시키는 이 작업은 그때까지 그런 종류의 연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적지않은 충격을 안겼다.'무엇이 될고하니'는 양반과 상놈계급의 차별, 양반에 의해 파괴되고 끝내는 죽음에 이르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더 이상의 섬세한 줄거리도 연출자의 꼼꼼한 작품 해석도 없다. '무엇이 될고하니'는 애초부터 완전한 희곡 작품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불완전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었다. 우리는 굿 판을 생각했다. 굿을 통해 한을 풀어주는 것. 우리가 작품 속에 집어 넣은 것은 샤머니즘과 난장(亂場)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장면. 무대 위에서 반드시 누군가가 죽고, 그리고 다시 사는 것이었다.
우리는 고작 몇 개의 상황, 몇 개의 장면으로 잘생긴 작품 하나를 건져냈다. 그건 누구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었다. 연출자 김정옥 선생이 언제나 연극의 핵심 코드는 배우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 모든 설정에 배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연출자가 배우들에게 장면을 제시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으면 배우들은 의견을 내놓는다. 그런 연후에 연출자는 배우들의 생각을 간추려 재구성을 하는 식의 작업이었다.
예를 들어 '죽음 뒤의 페스티벌'에서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은 누구일까를 생각했다.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 단종, 명성황후…. 우리는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보여주는 장면을 '죽음의 페스티벌'이라고 명명했다. 또 우리는 배우들 모두가 객석에 등을 돌리고 서서, 집단 총살 당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총소리가 나면 우리는 쓰려졌다. 우리의 전쟁, 거기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동포들, 부모, 형제들…. 또 장터 장면에서는 어떤 인물들이 합당할까, 생각했다. 엿장수, 이야기꾼, 거지패 같은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음악적이고 율동적인 요소, 시와 노래도 가미했다. 이 작품에서 나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렀다. 그 작업은 우리가 전혀 해본 적이 없었고 생소했던 만큼 퍽 재미있었다. 늘 뭔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연습장에 나와야 했고 새록새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게 신기하고 신났다.
공연 하루 전날 우리는 몇몇 연극 전문가를 초청했다. 일종의 시연회 같은 것이었다. 리허설은 조심스러웠다. 우리는 무대 위의 벽을 헐고 등·퇴장은 객석을 통해 했으며 죽음과 삶, 이승과 저승이 하나임을 무대와 객석을 연결시켜 표현했다. 우리 모두는 광대였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은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굿이 벌어졌다. 격렬하게 무당춤을 추어야 했다. 격렬한 만큼 섹시한 기분으로 정신없이 춤을 추면서 무대 위를 돌았고 심장이 터질 듯 힘이 들었다. 마지막엔 배우들이 들고 있던 모든 장구가 찢어지고 북채가 부러져나갔다. 춤이 끝나면 하얀 광목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쫙 깔렸다. 그것은 이승과 저승의 길 닦음을 의미했고 우리는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으로 퇴장했다."연극은 완벽하다. 배우들이 자신감만 갖추면 충분하다"는 유덕형 서울예대 이사장의 평을 들었다. 시연회를 마치고 다음날 세실 극장에서 막이 올랐다. 그날 우리는 관객과 하나였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외치고 싶다. 집단창조, 극단 자유, 그리고 앞광대, 뒷광대 모두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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