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31> 민청련(下)-고문 폭로, 민가협 출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31> 민청련(下)-고문 폭로, 민가협 출범

입력
2003.12.19 00:00
0 0

1985년 2·12총선은 전두환 정권에 위기감을 안겼다. 서울의 경우 신생 야당인 신민당의 득표율이 여당인 민정당보다 15%나 높았으며 그러한 현상은 6대 도시에서도 비슷했다. 전국적으로도 야당(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는 민정당보다 14% 앞섰다. 특히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사형을 선고 받았던 이철씨가 당선(서울 성북구)되는 등 운동권 인사들의 대량 득표는 군사독재 정권으로 하여금 모종의 결단을 구상하게 만들었다. 표면적으로는 '민심을 수용하는 유화정책'을 펴면서 민주세력에 대한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4월에 들어서면서 대우어패럴 노동자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노동계의 불만은 그대로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으며, 5월(23∼26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은 광주 민주항쟁 5주년 관련 대학가의 거센 시위와 맞물려 정권의 정통성을 흔들었다. 정부는 '학원안정법' 제정을 발표했다. 민청련은 즉각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관지인 '민주화의 길'을 통해 정권의 저의를 폭로했다. 그 내용은 각 대학의 유인물에 담겨 계속되는 데모·시위의 자료가 됐다. 5공 정권은 보다 근본적인 '처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당국은 민청련을 최종 목적지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7월초 민청련 상임위원 김병곤(서울 상대 71학번·민청학련 관련 무기징역 선고·90년 12월 사망)씨와 기독교청년협의회(EYC) 황인하 총무부장 등이 처음으로 구속됐다. 대학가의 시위를 주동한 '삼민투'의 배후라는 이유였다. 그동안 민청련 관련자들은 걸핏하면 경찰에 연행됐으나 '29일 이내 구류 처분-정식재판 청구-열흘 정도 지난 뒤 석방'이라는 패턴을 유지해 왔다. 이른바 현장에서의 격리 수준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구속은 모종의 신호탄이었다. 당시 김씨의 부인 박문숙(서울여대 74학번)씨의 설명.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연행됐을 때 용산경찰서에 가서 난리를 치니까 고○○ 검사 방에서 면회를 시켜 주더라. 그이가 자꾸 고무신을 벗었다 신었다 하며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키더라. 내려다 보니 조그만 쪽지 하나가 신발 속에 있었다. 내가 운동화 끈을 매는 척 하며 집어들고 나왔다. '조사 방향이 (삼민투 배후 색출이 아니라) 민청련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가는 것 같으니 김근태 의장이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민청련 사무실로 가서 전했는데 적극적 방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민청련 20주년 기념집'에서)

8월 10일 민청련은 서울 마포 신촌교회에서 제5차 정기총회를 열고 2년간 의장을 맡았던 김근태씨 대신 한경남(韓慶南·57·현 한나라당 당무위원) 당시 부의장을 의장에 선출하고, 구속된 김병곤씨 등을 부의장에 임명했다.

8월 24일 김근태 전의장이 서부경찰서에 연행됐다. '민주화의 길' 10호 논설(8.10자)에서 군사독재정권 퇴진을 강도 높게 주장했으며, 9호 논설(5.13자)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고 전두환 정권을 '악의 꽃'으로 규정했다는 이유였다. 그것이 민청련 전체를 말살하기 위한 계산된 작전의 시작이었음은 9월 4일 김 전의장이 남영동 대공분실로 옮겨지면서 드러나게 된다.

김 전의장은 당시 민청련 상임위 부위원장으로 운동권 최고의 이론가로 알려진 이을호(서울대 철학과 74학번)씨와 함께 구속돼 23일간 살인적인 고문을 받았다. 김 전의장은 법정에서 자신이 조사를 받았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하는 인간 도살장'에 비유했다. 당국은 이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의 틀을 준비해 놓고 'R(revolution·혁명)'과 '폭력'이란 말을 집어 넣었다. 당시 CD(civil democracy·시민민주주의) ND(national democracy·민족민주주의) PD(people democracy·민중민주주의)는 일반화한 개념이었고 민청련 모임 등에서 자주 회자되는 용어였다. 여기에 'R'자를 고안해 첨부한 것은 남영동 수사관들이었다. 민청련이 CDR, NDR, PDR을 위해 '폭력'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진술되어야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남영동 수사관들은 민청련을 '혁명을 위한 폭력 단체'로 조작하는데 성공한다. 9월 말 김 전의장이 남영동을 떠나 검찰로 송치된 직후 '폭력혁명의 근거지'로 몰린 민청련 사무실이 폐쇄되고 10월 2일을 전후해서 민청련 지도부가 일제히 검거됐다.

5공 정권이 민청련 핵심 인사들을 구속한 것은 그야말로 '뱀이 두꺼비를 삼킨 꼴'이 됐다. 김 전의장의 부인 인재근(印在謹·50·이화여대 사회학과 72학번)씨를 통해 폭로된 고문과 용공조작 사실은 12월 19일 김 전의장의 첫 공판에서 지극히 자세히 확인된다. 이를 계기로 70년대 이후 모든 '고문 및 용공조작' 사건에 연루된 가족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발족된다. 또 민가협 '어머니 부대'는 민청련과 재야의 모든 민주화 세력을 연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87년 1월 바로 그 남영동에서 박종철 군이 고문치사했음이 밝혀지면서 6월 항쟁의 불꽃이 타오른다.

/정병진편집위원 bjjung@hk.co.kr

■민가협 창립총무·김근태 부인 인재근씨

85년 9월 4일 새벽 서울 서부경찰서로 형(남편인 김근태씨)을 만나러 갔다. 8월 24일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고 석방되는 날이었다. 민청련 의장에 선출된 이후 7번째 구류였다. 당국은 그동안 민청련 관련 '일'이 있을 때면 1주일 혹은 10일, 보름씩 형을 경찰서 유치장에 격리시키곤 했다. 하지만 그날 오전 6시가 넘어도 나오지 않았다.

그 해 9월 26일은 잊을 수 없다. 7일자로 구속됐으므로 26일까지 검찰에 송치 돼야 한다는 것은 오랜 투쟁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 며칠 전부터 검찰청사 대기실 주변을 하루종일 들락거렸다.

26일 아침에 가니 김○○ 검사 신문이 내정돼 있었다. 5층 검사실 주변을 서성였다. 오후 2시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형이 경찰 1명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피의자 전용 통로가 있었으나 그가 제대로 걷지 못하니 일반 엘리베이터를 사용한 것이었다. 대기실로 옮겨져 기다리는 40여분 동안에 형은 복도창문을 통해 숨넘어가듯 말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5시간씩 10번 당했다. 4일 8일 13일 각 2번씩, 5일 6일 10일 20일 각 1번씩 당했다"고 두어번 상세히 소근거렸다. 신고있던 양말을 벗어 나에게 몰래 건네며 발뒤꿈치와 팔꿈치를 보여주었다. "온몸을 담요로 둘러싸이고 꽁꽁 묶인 채 고문을 받았으나 고통에 몸부림치다 난 상처"라고 말해 주었다.

발뒤꿈치를 보니 진물이 나고 피가 엉켜 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가 다시 짚차에 태워지는 것을 보고 목요기도회가 예정돼 있던 기독교회관으로 달렸다.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했다. 때마침 약수동 형제교회에서 민청련 중앙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 다시 뛰었다. 민청련 멤버들과 함께 역곡에 있는 우리집으로 갔다. 밤새 성명서와 호소문 등을 준비하고, 머리띠까지 만들어 다음날부터 기독교회관에서 그들과 함께 농성을 시작했다.

민청련 동지들과 구속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물론 김수환 추기경까지 고문으로 모시고 조직적 연대활동을 시작했다. 농성장인 기독교회관은 목요기도회를 중심으로 구속자·장기수 가족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구속자 가족 협의회'를 모태로, 79년 남민전 사건 관련 '장기수 가족 협의회',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 관련 '구속학생 학부모 협의회', 대우어패럴 동맹파업 등으로 생겨난 '구속노동자 가족 협의회' 등 이미 구성돼 있던 모임들과 함께 농성했다. 우리는 보다 조직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각 협의회 대표가 공동의장단이 되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약칭 민가협)'를 구성했다. 민청련 여성동지들이 실무를 맡기로 하고 내가 총무에 임명돼 그해 12월 12일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에서 발족식을 가졌다.

'한 개인의 석방을 애걸하기보다 민주화의 대열에 함께 서는 것이 고통받는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이다'는 창립선언문처럼 민가협은 민주화 실천 조직이었다. 남편이나 가족의 뒷바라지도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집에서 가까운 경찰서를 담당구역으로 정해 두었다. 시위나 농성으로 잡혀간 사람들 가족의 신고를 받았다. 우리는 그들의 누나나 형수 등으로 위장해 면회를 가서 애로사항을 듣고, 담배나 영치금을 건네 주었다. 우리를 따라간 아이들이 경찰서 책상 위로 기어다니고, 오줌도 싸고 하니 경찰들은 오히려 '빨리 면회하고 가라'는 식으로 우리의 면회를 선뜻 허락해 주기도 했다.

민청련 간부들의 재판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발품을 팔아 고문한 경찰의 이름과 직책을 모조리 알아냈다. 다만 '출장 전기고문 기술자'는 파악하지 못했는데 그는 나중에 '이근안 경감'으로 밝혀졌다. 비밀 수사기관도 모두 찾아 공개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송파 보안사, 장안동 경동산업, 신길동 신길상사, 옥인동 시경 분실 등. 옥인동 분실이 나중에 홍은동으로 옮겨 간 것까지 찾아내 우리가 달려가면 경찰은 혀를 내둘렀다.

'고문 대책위'는 민가협 연대를 바탕으로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 대책위는 86년 '부천서 성고문 대책위원회'로 이어졌으며,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