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례에 대한 하급심 판사들과 변호사들의 끊임없는 '도전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이 '재심(再審) 청구' 분야다. 조총련 간부의 지령을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1980년 징역 15년이 확정돼 형 집행까지 마친 재일동포 신귀영(66)씨 사건은 '재심'에 대한 하급법원과 대법원의 대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신씨 사건은 94년과 99년 두 차례 무죄 취지로 재심이 청구된 이래, 총 7차례의 심리에서 3차례의 재심개시결정(부산지법 2차례, 부산고법 1차례)과 4차례의 파기 및 기각(대법원 2차례, 부산고법 2차례)을 거쳐, 현재 다시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진상규명 노력으로 사건 자체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고,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당시 변호를 맡아 10년 가까이 각급 법원 전체를 전전하고 있는 이 사건에서 대법원의 재심개시결정 파기는 많은 논란과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재심은 사실 확정된 판결의 오판을 인정하고 처음부터 다시 심리를 한다는 점에서 '일사부재리'와 '3심제'라는 사법부의 대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재심 법정의 피고인은 어쩌면 잘못된 판결을 내린 사법부인 셈이다. 때문인지 특히 형사사건의 재심과 관련, 대법원은 "가혹하다"할 정도로 엄격한 판례를 유지하고 있다.
신씨 사건의 재심청구에 대한 첫 재판부였던 부산지법은 재심 요건에 대해 "진범이 나타나는 경우처럼 범죄사실의 부존재가 증명되는 경우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새 증거와 기존의 전 증거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확정판결이 인정한 범죄사실의 부존재에 관해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경우, 즉 범죄의 증명이 충분하지 않게 되는 경우까지 포함한다"(94재고합2)고 재심개시결정을 내렸다. 부산고법도 그대로 인용한 이 결정에 대해 대법원은 그러나 형사소송법 420조의 재심 사유중 '무죄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를 "명백한 증거란, 그 증거가치가 다른 증거들에 비해 객관적인 우위성이 인정되는 증거로, 법관의 자유심증(재량)에 의하여 그 증거가치가 좌우되는 증거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서 탄약고 등을 사진 촬영하는 등 간첩 행위를 했다는 신씨 혐의에 대한 무죄의 증거들로, 변호인들은 당시 해당 버스 노선이 있지도 않았다는 점, "사진촬영을 목격했다"며 공소사실을 지탱해준 증인들조차 이후 "고문으로 허위증언을 했다"고 주장한 점 등을 제시했다. 이 사건에 대해 한 변호사는 "대법원의 재심요건을 만족시킬 만한 것은, 다른 진범이 잡혔을 때 외에는 없다"며 "진범이 없는 간첩조작사건의 경우는 아예 재심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씨 사건에서 대법원이 안겨준 좌절은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심사건에 대한 부담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인혁당 사건의 경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고문사실 등에 대한 조사결과를,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재심사유 가운데 "수사과정에 불법이 있었다는 것이 별도 법원의 확정판결로 확인될 때"로 볼 수 있는 지 여부도 지켜볼 대목이다. 또 "(공소시효가 끝나버린 경우 등) 확정판결이 불가능한 때에는 불법 수사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 형소법 422조의 '사실 증명' 요건에 의문사위의 조사결과가 해당되는 지도 법원이 판단할 부분이다.
그러나 신씨 사건과 달리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약간 다른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신씨 사건은 사건 당시 부산지검이 수사에 개입한 까닭에 검찰이 하급심의 재심개시결정에 반대해 대법원 재항고까지 불사하고 있지만, 군법원에서 본안 재판이 이뤄졌던 인혁당 사건은 하급심에서 재심개시결정이 내려질 경우 검찰이 여론에 반해 무리하게 항고와 재항고를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실제 지난 10월 서울고법 형사4부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게 전기고문 등을 당해 간첩으로 조작된 후 84년 무기징역형이 선고됐던 함주명(72)씨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3년 만에 받아들여 재심개시결정을 내렸지만, 이씨의 고문사실을 수사로 밝혀냈던 검찰은 이 결정에 대해 대법원에 항고를 하지 않아 함씨의 재심결정은 그대로 확정됐다. 더 나아가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형사소송법의 재심요건과 상관없이 재심개시결정이 내려지고, 최종 무죄가 확정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피고인들은 더 없이 편한 경우였다.
민사사건의 경우 재심요건이 새로운 증거보다는 기존 증거의 위조나 잘못된 재판부 구성 등 형사사건과는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형사 피의자가 '잘못된 재판부 구성'과 같은 민사소송법상의 재심사유를 적용해 달라고 제기한 재심청구를 기각, 각각 재산과 신체를 담보로 하는 민·형사상 재심청구 차이의 취지를 확인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국내 주요 재심사건
국내에서 제기된 주요 형사 재심 사건들은 사실 사법부를 통한 '과거청산'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됐고,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들이 변론을 맡아 왔다. 물론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진상규명 노력 없이는 재심 청구 자체가 불가능했던 사건들이다.
신귀영씨 사건은 변호사 시절 부산종합법률사무소 소속이었던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첫 재심청구부터 줄곧 맡아 오다 청와대 입성후 정재성 변호사가 뒤를 이어 진행하고 있다.
지난 해 제기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재심청구는 법무법인 덕수의 김형태 변호사와 법무법인 자하연의 이유정 변호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 최근 재심개시결정이 내려진 함주명씨 사건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란음모 사건은 법무법인 지평의 조용환 변호사와 법무법인 한강의 최재천 변호사가 각각 맡아 진행하고 있다.
한편 천주교인권위는 또 다른 간첩 조작 사건인 이장형씨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준비하고 있지만 "법원이 인정할 만한 증거들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