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 윤창번(尹敞繁·49) 사장이 취임했을 때 하나로통신은 사실상 '난파선'이었다. 대주주(LG 삼성 SK)간 이해관계가 뒤엉키면서 회사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전임 신윤식 회장의 사퇴 이후 5개월 여 동안 리더십의 부재속에서 직원사기 역시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윤 사장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하지만 그가 꼬일대로 꼬인 하나로통신에서 과연 해결사로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잭 웰치가 와도 힘들걸?' '윤 사장 길을 잘못 들어간 것 아냐?'
시작은 예상대로였다. 취임 한달도 못돼 그는 대주주간 극한 대결속에 증자가 무산되고 디폴트(지급불능) 직전상황까지 몰리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선주(船主)'간 다툼에 '난파선 선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CEO로서 회사를 살리는 것 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부도상황을 벗어나 재도약의 기틀만 다질 수 있다면 가릴게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 때부터 윤 사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뚝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9월초 그는 최대주주인 LG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면서 뉴브리지-AIG컨소시엄과 외자도입계약을 체결했다. LG의 반대로 주총 표결이 불가피해지자, 이번엔 전 임직원들과 함께 '발품'을 팔면서까지 소액주주 위임장 모집에 들어갔다.
'다윗(하나로통신)과 골리앗(LG)의 싸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로 여겨졌지만, 결국 하나로통신은 10월 주총에서 압도적 표차로 외자유치안을 관철시키는 역전승을 일궈냈다. '그 사람 보통이 아니네…' 윤 사장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최근 수년간 IMT-2000 실패, 두루넷과 파워콤 인수무산, 유동성 위기 등을 거치면서 회사내부엔 일종의 패배의식이 팽배해있었지요. 이번 경영권 분쟁과정에서 우리는 돈 보다도 중요한 '할 수 있다'는 자신감(Can-do spirit)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로통신 CEO가 되기 전까지 그는 대표적인 통신정책 전문가였다. 통신산업방향과 규제정책을 연구하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에서 기획조정실장, 동향분석실장, 부원장 등 요직을 거쳤고, 최근 3년간 원장을 지냈다.
CEO 경력은 비록 4개월 남짓하지만, 통신산업과 기술의 흐름은 손바닥보듯 꿰차고 있다.
"광대역(브로드 밴드) 시장은 이제 포화상태입니다. 고객유치 못지 않게 고객유지가 중요한 상황이지요. 결국 열쇠는 고객만족에 있고, 이를 위해선 전 임직원이 현장을 뛰어야겠지요. 영업사원만 영업을 해선 살아남기 힘듭니다."
윤 사장은 직원들에게 '멀티 플레이어'가 되기를 강조하고 있다. 주력 상품인 시내전화와 초고속인터넷 시장에서 1,600명 직원으로 거대 KT와 경쟁하려면 '1인1역'으론 불가능하다는게 그의 지론. "우리회사의 가장 큰 자산은 통신망이 아니라 직원입니다. 사람을 줄이는게 능사는 아니지요. 지속적으로 재교육을 한다면 경쟁력이 없는 사업을 정리해도 얼마든지 인력 재배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지요. 정 교육받기 싫으면 밖에 나가 고객과 이웃을 위해 봉사라도 하라는 것이 나의 지론입니다."
하나로통신은 이제 외자유치와 임원진 인사를 마무리짓고 제2의 창업을 위한 본격적인 미래비전 마련작업에 한창이다.
하지만 KT가 지배하는 유선통신시장에서 과연 하나로통신의 설 땅이 얼마나 될 지 회의적 시각도 많은게 사실. 그러나 윤 사장은 의외로 자신만만했다.
"두고 보세요. 달라질 겁니다. 시내전화의 경우 내년 8월부터 서울지역까지 번호이동성이 시행되면 하나로통신의 저렴한 가격과 우수한 품질이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겁니다. 물론 마케팅도 강화할 예정이지요. 장기적으론 20% 이상 시장점유율을 확보한다는게 목표입니다. 하지만 후발사업자로서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긴 하지요. 지배적 사업자로의 쏠림 현상이 불가피한 통신산업의 성격을 감안할 때 후발사업자들의 실질적 경쟁토양을 마련하는 비대칭규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초고속인터넷의 경우 두루넷 인수를 추진하되 결코 무리한 가격을 써내지는 않겠다는 입장. 대신 내년 말 사업자가 선정될 2.3㎓ 휴대인터넷에 참여하고, 각종 콘텐츠 사업자와 제휴도 강화해 종합통신서비스 회사로 다시 태어난다는 구상이다.
하나로통신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험하다. 유동성 위기는 벗어났지만, 정글 같은 통신시장을 뚫고 가는게 보통 일은 아니다. "change(변화)에서 g를 c로 한 자만 바꾸면 chance(기회)가 되잖아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롭게 시도하는 기업에겐 반드시 기회는 옵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1954년 서울 출생
경기고,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미국 콜럼비아대 경영학 석사,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영학박사
1986∼87년 미국 휴스턴대 경영대학원 교수
1987∼89년 산업연구원(KIET) 연구위원
1989∼2000년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기획조정실장 동향분석실장 부원장
2000∼03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2003년 8월 하나로통신 사장
● 尹사장은 누구
윤창번 사장은 젊고 감각적이다. 업무외적 모습에서도 그의 이런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건강관리 타고난 건강 체질이고 운동을 아주 좋아한다. 경기고 재학시절엔 문과도 이과도 아닌 '무과(武科)생'이란 별명까지 들었다. 테니스가 수준급이고 골프도 한때는 2오버파를 기록했을 정도라고. 최근 핸디는 12. 하지만 하나로통신 사장 취임 이후엔 운동은 커녕 건강에 신경 쓸 시간조차 없다고 한다.
주량 건강 체질 이다 보니 한때는 두 자릿수의 폭탄주를 마셔도 끄떡 없을 만큼 상당한 주량을 자랑했는데, 요즘은 소주 1병 정도가 적당량이다.
취미 원로 피아니스트이자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를 역임한 고 정은모 여사가 윤 사장의 모친. 어릴 적부터 예술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때문인지 클래식 음악에 정통하고, 수천 장 CD를 갖고 있을 만큼 재즈 애호가이기도 하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한때는 작품 컬렉션을 했을 정도.
애창곡 임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편인데, 노래방이라도 가는 날이면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라기 일쑤다. 직원들이 생각한 윤 사장 애창곡은 '두만강 푸른물에∼'까지는 아니더라도 기껏해야 '돌아와요 부산항에∼' 정도. 하지만 마이크를 쥐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18번은 뜻밖에도 윤도현 밴드의 신곡들이라고 한다.
어떤회사
시내전화와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 유선통신회사. KT가 독점해온 시내전화 사업을 경쟁체제로 전환한다는 취지에서 1997년 데이콤과 삼성 SK 대우 등 주요 재벌 그룹들의 출자로 탄생했다.
출발은 좋았다. 99년 4월 국내 최초로 초고속인터넷(ADSL)을 상용화하는데 성공한 것을 비롯, 무선인터넷과 무선 랜 분야에서 연이어 개가를 올렸고 미국 동남아 등 해외로도 잇따라 진출했다. 정보기술(IT) 붐을 타고 코스닥 등록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IT 붐이 꺼지고, 국내 통신시장이 과당 경쟁 속에 포화단계로 접어들면서 시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설립 초 무리한 시설투자와 공격적인 확장정책은 2조원이 넘는 막대한 빚을 남겼다. 책임 있는 단일 대주주가 없다는 태생적 제약 속에 주요 대주주를 구성하고 있는 재벌 그룹들이 재무구조 건전화를 위한 증자 및 외자유치 시도 때마다 갈등을 노출, 부도직전 상황까지 몰리기도 했다.
하나로통신은 8월 이후 유동성 해결을 위한 외자유치 추진과정에서 최대주주인 LG와 회사측이 정면 대결하며, 소액주주 표를 확보하기 위한 사상 초유의 '위임장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주총 표 대결 결과, 회사측이 추진한 5억달러 외자유치(6억 달러 차입 별도)안이 확정됐고, 하나로통신의 최대주주는 LG에서 미국계 뉴브리지-AIG 컨소시엄으로 변경됐다. 하나로통신은 10월 말 현재 시내전화 시장에서 4.3%, 초고속인터넷시장에서 24.5%를 점유하고 있다. 향후 초고속인터넷 사업강화를 위해 두루넷 인수를 추진 중이며, 내년 말 사업자가 선정될 휴대인터넷 서비스도 야심차게 준비 중이다.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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