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현실에 대한 반란인가, 혹은 도피인가. 2003년은 극심한 불황과 취업난, 여야 정치권 격돌로 어느 해보다 우울했지만, 대중은 그런 현실을 까발리고, 비틀고, 뒤집으면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7개 키워드를 통해 올해 대중문화의 흐름을 돌아봤다. /대중문화팀● '짱' 열풍
얼굴이 잘 나서 '얼짱', 노래방 엽기퍼포먼스로 스타가 된 '노래방짱', 몸매가 끝내주는 '몸짱'…. 최고를 뜻하는 10대 은어에서 대중문화 핵심키워드로 발전한 '짱' 신드롬은 정치자금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에게 '안짱'이란 별칭을 달아주기에 이르렀다.
'짱' 열풍의 진원지는 한 여고생이 인터넷에 떠도는 예쁜이 사진을 모아 만든 '5대 얼짱' 카페. 여기서 배출한 박한별 임수정 등은 이미 스타가 됐고, 가는 곳마다 '얼짱 콘테스트'가 줄을 잇고 있으며, 약삭빠른 한 전자회사는 사진이 실물보다 예쁘게 나오는 '얼짱폰'을 내놓았다. '얼짱'은 외모지상주의의 극치라는 비판도 받지만, 네티즌이 직접 뽑고 키워낸 스타라는 점에서 '빠순이'(무분별한 스타 추종자)로 대표되던 팬덤 현상의 진화로 평가할만하다.
● 백수
드라마나 영화 속 '백수' 대접이 달라졌다. 잘난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소품'에 불과했던 백수 캐릭터가 당당히 주인공을 꿰찬 것. 백수, 백조(여자 백수)의 일상을 소재로 한 영화 '위대한 유산' '똥개'에 이어, 드라마 '백수탈출'은 아예 3대가 백수인 집안이 무대였다. 현실의 백수도 인터넷에 모여 생활 노하우를 공유하는 등 보다 당당해졌다.
백수들의 '대변신'에는 극심한 취업난으로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란 신조어까지 떠도는 암울한 현실이 깔려있다. 백수는 더 이상 '무능력한 소수'가 아니라, 바로 나와 내 가족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대중문화 속 백수 캐릭터의 변화를 지켜보는 눈길이 곱지만은 않다. 남의 불행을 눈요깃거리로 이용한다는 비난이 바로 그것이다.
● 바람
'불륜'이 아니라 '바람'이다. 불륜이라는 말에 엄숙한 도덕적 판단이 따른다면, 바람은 훨씬 가볍다. 그야말로 '유희 같은 바람'이 유행한 한해였다. 특히 남성 중심적인 바람이 아니라, 여성들의 '바람'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바람'은 전위적 문화 코드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비교적 보수적인 TV 드라마도 여성의 바람을 내세웠다. 바람이 인생의 '선택'인 것처럼 표현된 '앞집 여자'는 바람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가를 증명했다. 영화 '바람난 가족'의 '바람'은 허울뿐인 가족을 해체시키는 단서가 됐다. 바람둥이 남자가 나온 '옥탑방 고양이'는 '혼전 동거'에 관한 논란을 일으켰고, '싱글즈'의 주인공은 당당한 싱글맘을 선언했다. 바람, 동거, 미혼모, 싱글맘. 전통적 가족의 해체를 상징하는 이 단어들이 가장 활발히 통용된 한해다.
● 누드
하루 걸러 한 명이 벗었다. 가수 김지현 하리수 김완선 베이비복스, 탤런트 권민중 이혜영 이지현 등 연예인이 줄줄이 누드를 찍었다.
인터넷과 휴대폰 등 모바일의 발달로 '누드'가 각광받는 콘텐츠 상품이 된 데 원인이 있다. 고가의 누드집과 달리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한 소액 결제가 가능, 누드 상품을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몇몇 연예인은 수 십억원 대의 수익을 얻기도 했다.
오페라 '리골레토', 무용 '봄의제전' '애프터 에로스' 등은 공연 중간에 전라 장면이 나온다는 이유로 화제가 됐다.
누드라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적인 관심을 모으는 현상은 억눌린 우리 성문화의 증거다.
● 사투리
표준어에 밀려 변방에서나 울리는 소리로 취급 받던 사투리가 버젓이 대중문화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영화, 드라마, 코미디 할 것 없이 흥행에 성공한 작품 뒤에는 사투리가 있다.
'친구' 이후 영화에 불어닥친 사투리 바람은 '선생 김봉두'를 거쳐 '황산벌'에서 절정을 이뤘다. 신라와 백제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인 황산벌은 그야말로 사투리의 향연장이었다. TV에서도 마찬가지. '개그콘서트'의 '생활사투리' 코너는 아예 사투리 강좌를 표방하고 나섰고 드라마 '달려라 울엄마'에서는 사투리를 쓰면서도 아나운서를 꿈꾸는 사투리 3인방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사투리 열풍은 우리 언어의 또 다른 표현 창구를 열어놓았으며, 표준어 중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문화 충격이었다.
● 혼자 놀기
여럿이 모여 고스톱이나 쳐야 제대로 놀았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겁게 논다. 디지털 문화의 확산 덕분이다. 블로그(blog) 사이트가 인기를 끌면서 젊은이들은 디지털 카메라로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을 끊임 없이 담아 내고 또 인터넷에 올리며 세상과 소통한다. 합성사진 만들기도 더 없이 좋은 혼자놀기. 동료와의 대화보다 인터넷 메신저를 즐기고, 지하철에서도 휴대폰 문자 보내기에 몰두한다.
휴대폰, 인터넷 등의 발달은 개인의 소통 가능성을 확장 시켰지만 개개인은 소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이 소외감은 죠리퐁 혹은 콘택600 알갱이 세기 등 외로움을 달래는 극단적인 놀이를 탄생시켰다. "어차피 혼자사는 세상, 친구가 무슨 소용입니까" 개그맨 이정수의 이 외침은 현대인의 외로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 폐인
'폐인' 풍년이었다. 심신이 망가진 사람을 뜻하던 폐인은 21세기 들어 마니아라는 또다른 뜻을 얻었다. 디지털카메라에 빠진 사람들의 모임인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kr)의 디씨 폐인, 드라마 '다모'의 열성팬을 가리키는 다모 폐인, 인터넷 검색사이트 네이버(www.naver.com)의 지식인 정보코너를 이용하는 '지식인 폐인'…. 특히 '다모' 열풍은 다모 폐인을 넘어 여러 분야로까지 확산되며 폐인 바람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폐인 바람은 새로운 마니아 문화를 형성하지만, '폐인연합'처럼 단체로 뭉쳐 마음에 안드는 대상을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과격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한 가수에 대한 집단 안티 행동은 앞으로 등장할 또 다른 폐인 문화에 대한 우려를 낳은 대표적 사례다.
● 장금이가 말하는 올 유행어
안녕하시온지요. 올 해 시청자들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바로 저 '장금이'가 아닐까 싶네요. 사람들은 화면에 비친 저를 보고 "피부가 장난이 아닌데"(CF)라고들 말하지만, 특별한 비결은? 물론 비밀이지요. "오나라 오나라 아주 오나∼∼∼"(대장금) 앗, 또 오버를 하게 되네요. 올 한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제가 요즘 이런 일이 잦아졌지 뭡니까. 때로 저는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천년지애) 이런 잠꼬대까지 한답니다. 아무래도 궁녀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닐지.
무엇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참 '거시기'(황산벌)한 어려운 한 해였죠. '사오정'(45세 정년)이란 말을 들을 때도 깜짝 놀랐는데, 이제는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까지 있더군요. "아프냐? 나도 아프다"(다모) 이렇게 위로를 해드리고 싶지만, 장난 친다고 혼이나 나지 않을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니들이 게 맛을 알어?"(롯데리아 CF) 이렇게 외쳐 보세요. 속이 좀 후련해지지 않을런지요. 그런데 조심할 것도 많아요. 입 하나 덜어보려고 (군대에) "꼭 가고 싶습니다"(박카스 CF)를 외쳤던 한 청년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긴 했어요. 그건 초라한 백수를 "두 번 죽이는"(노브레인 서바이버) 일인지를 사람들은 모르겠죠.
올해는 특히 여자들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한 해 같아요. '바람은 결혼 생활의 비타민'(앞집여자)이라고 '쿨'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바람난 여자를 보고 "500년 왕재수"(완전한 사랑)라며 "나가 있어"(개그콘서트)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은 게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니깐 공연히 아무 곳에서나 "통하였느냐"(스캔들)를 남발하다가는 큰 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조용히 "날 말아줘, 날 눌러줘"(자두의 '김밥') 노래나 하고 계세요.
세상 모든 사람들을 "Just 10 Minutes"(이효리) 안에 휘어잡고, 그들로부터 "맞습니다, 맞고요"(노통장)같은 찬사를 얻어낼 방법이 있다면, 내년 한 해는 멋진 한해가 될 텐데. "입에서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이온데"(대장금) 하던 어린 장금이처럼, 그냥 홍시 맛이 나면 홍시라고, 땡감 맛이 나면 땡감이라고 말해보세요. 거짓을 강요하고, 트럭 떼기나 하는 나쁜 소식이 나오는 올 지긋지긋한 한해 대신 저 장금이처럼 정정당당 실력으로 승부하는 내년 한해를 '공개수배합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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