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미술관에서 '전시'된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읽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지고 만져지기 위해서 책이 그려지고 만들어진다? 최근 미술관, 화랑에서 책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책과 미술이야 원래 뗄 수 없는 것이지만 최근의 책 주제 전시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한다. 책이 이제 사람들이 곁에 두고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박물관에서 고대의 유물을 보듯 '아! 저런 것이 있었지' 하는 심정으로 들여다보는 전시회 출품 목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느낌 때문이다.금호미술관은 19일부터 내년 2월28일까지 '사람을 닮은 책, 책을 닮은 사람' 전을 연다. 교보문고와 공동주최로, 갤러리 아트링크가 주관하고,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이 후원한다. 44명의 작가가 책을 주제로 한 조각, 설치, 회화, 아트북, 도서관 만들기 작업을 선보이고 13명의 어린이들과 공동작업도 했다.
이들이 만든 책은 단지 기억의 보존과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어루만지거나 해체한 책이다. 교양과 계몽을 위한 책이 아니라, 책이라는 사물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예술적 체험을 촉발시키기 위한 작품이다.
홍경택은 엄청난 규모의 책이 산만하면서도 정연하게 쌓여있는 그림으로 요즘 책이 가진 키치적 성격을 보여준다. 조성준은 마치 탑처럼 책이 쌓여 있는 회화를 통해 정적인 사유의 계기를 준다. 디지털 책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는 강애란은 '한 묶음의 지혜'란 이름의 설치 작품을 내놓았다.
어린이와 작가들이 함께 만든 계란껍질 텍스트, 반대로 거대하게 확대한 책 등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 만하다. 미술관에 만든 연못 속에서 두레박을 끌어 올리면 책이 담겨 올라오는 즐거운 작업도 있다.
이 전시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18일 오후 5시 개막식으로 열리는 퍼포먼스 '책거리'다. 3,000∼4,000여 권의 책을 쌓아놓고 관람객들이 가져가게 한다. 이 책들은 수도권의 한 문닫은 서점에서 나온 것이다.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서해성 사무처장은 "서점주인이 그냥 가져가라는 것을 권 당 50원에 사왔다"고 말했다. 그는 "책 안보는 우리 사회 분위기에서 서점과 출판사들이 잇달아 문을 닫는 출판문화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라며 "비문화적 디지털 시대에 대한 경고이자 책읽기 문화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한 것"이라고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대한출판문화협회와 공동 주최로 25일부터 내년 2월1일까지 제7전시실에서 '2003 서울 북아트―아트 북 아트' 전을 연다. 책의 의미와 아름다움,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책의 기능과 역할을 생각해 보게 하는 전시이다. 개막식이 열리는 24일 오후 2시에는 이남호 고려대 교수가 '문자제국 쇠망 약사'라는 주제로 특별 강연도 한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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