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의 기운을 담은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7세기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당)에서 부처의 사리와 옷가지를 가져와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 등 이 땅의 다섯 곳에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었다.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상(像)이 없다. 부처의 몸이 있으니 따로 상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부처상이 앉는 수미단에는 빈 방석만 놓여 있다. 1,300년이 넘도록.더러운 진흙탕이다. 몸과 마음을 음습하게 만드는 흙은 다름아닌 더러운 돈이다. 권력과 추종, 협박과 유착, 뇌물과 대가 등등의 추악한 거래 이면에 널린 천문학적 액수의 돈 이야기가 연일 터져나온다. 억장이 무너진다. 이 속세를 잠깐이나마 떠나고 싶다. 침잠과 명상의 시간을 갖고 나를 되돌아보고 싶다.
산사로의 나들이를 계획한다. 보통 산사가 아니다. 절집의 으뜸인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적멸'은 '일체의 번뇌에서 해탈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높은 경지'를 일컫는다. 다른 말로 '열반(涅槃·Nirvana)'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진정한 '비움'의 가르침을 티끌만큼이라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강원 정선군 고한. 국내 유일의 카지노인 강원랜드가 이 곳에 있다. 과거엔 석탄 산지로 유명했다. 한국 근대화의 에너지 구실을 했던 곳으로 아직도 몇몇 곳엔 탄광이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곳의 풍광은 복합적이다. 아니, 혼란스럽다. 그 혼란스러움의 한 가운데에 진흙속의 연꽃 같이 맑은 절이 있다. 정암사이다.
절 아래로 흐르는 개천의 바위가 온통 붉은 색이다. 폐광에서 흘러내리는 물 때문이다. 아직 철거되지 않은 철골구조물을 훑고 내려온 물은 계곡의 돌과 모래에 잔뜩 녹을 입혀 놓았다. 이제는 빈집이 되어버린 산기슭의 오두막집, 죽은 자의 썩어 들어간 눈처럼 시커먼 창문을 드러낸 아파트, 쉰 듯한 탄차의 기적소리….
정선의 사북, 고한 땅에 탄광이 들어선 것은 1948년 함백광업소가 문을 열면서부터이다. 50년이 넘게 제 땅과 살을 파내 국가 산업화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곳의 산천은 마구 무너져내렸다. '막장'으로 내몰렸던 많은 광원들의 눈물어린 삶도 곳곳에 묻어있다.
고한에서 만항쪽으로 뚤린 414번 지방도로를 따라 오르면 왼편으로 호젓한 산사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의 현판에 태백산 정암사(淨岩寺)라고 씌여있다. 석탄을 캐기 전까지 깨끗한 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흘렀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온통 탄가루로 뒤덮였던 때에도 이 절은 그 깨끗함으로 이 곳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탄때와 눈물때를 씻어주었다.
이 절에 적멸보궁이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마지막으로 만든 보궁이고 율사는 이 곳에서 입적했다.
새로 단장한 일주문에 들어서면 티끌 하나 없는 마당이 펼쳐진다. 우람한 축대 위에 세워진 육화정사가 왼쪽으로 보이고 범종각이 정면에 나타난다. 적멸보궁은 범종각 뒤에 자리잡고 있다. 가슴 높이의 야트막한 돌담이 에두르고 있는 적멸보궁과 그 앞뜰은 차분하게 단장된 정원처럼 운치가 흐른다.
고색이 깃든 기둥과 단청이 하얗게 날아간 서까래, 귀퉁이가 비바람에 깎여 둥글 넙적하게 된 돌계단…. 보궁은 파란 기와를 올린 지붕을 제외하고 옛 세월 속에 멈춰 선 듯하다. 왼편으로는 작지만 위엄 있는 나무가 솟아있다. 자장율사가 지팡이를 꽂아놓았는데 싹이 나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설명이 쓰여있다. 사실이라면 수령이 1,300살이 넘는다.
부처의 사리는 보궁 뒤에 있는 천의봉 절벽 위 20m 지점의 수마노탑에 봉안돼 있다. 마노석이라는 이름의 석회암 벽돌을 채곡채곡 쌓아올리고 상륜부를 청동장식으로 씌운 수마노탑은 한반도에서 보기드문 7층 모전석탑(돌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다. 보물 제410호로 지정돼 있다.
탑에 가려면 보궁 오른편으로 난 비탈 계단을 200m 정도 올라야 한다. 계단이 정겹게 만들어져 있다. 탑에 오르면 정암사의 전경이 고즈넉하게 내려다 보인다. 아담한 산신각과 여전히 푸른 소나무, 그리고 깨끗하게 정돈된 장독대…. 참배객은 묵상에 잠긴다. 정암사에는 독특한 것이 있다. 절 가운데로 흐르는 냇물이다. 얼음이 성기게 언 사이로 하얀 포말이 흐른다. 아주 맑다. 이 곳에는 열목어가 산다. 그래서 이 냇물 자체가 천연기념물 제73호다. 단순히 열목어가 산다고 해서 독특한 것이 아니다. 절 바깥의 개천에는 쇳물이 흐르지만 절 안의 물은 열목어가 살만큼 청정옥수이다. 부처의 세계여서 그럴까. 다시 묵상에 잠긴다.
/정선=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관련기사 C2·3면
가는길
아주 복잡하다. 고속도로와 같은 직선도로에서 많이 떨어져있다. 수도권에서 가려면 영월을 거쳐야 한다.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 신림IC로 빠진다. 88번 지방도로로 황둔-주천을 거치면 영월. 영월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석항-신동-남면-사북을 지나면 고한읍에 닿는다. 고한읍 시가지의 끝에서 길이 갈린다. 오른쪽으로 414번 지방도로가 나 있다. 이 도로를 타고 약 10분 달리면 왼쪽으로 정암사 일주문이 보인다. 2년 연속된 수해로 곳곳의 길이 망가져 있다. 조심운전 필수. 정암사 종무소 (033)591-2469.
머물곳
카지노가 들어있는 강원랜드(033-590-7700)의 호텔이 대표적. 20만원대로 비싸다. 태백산도립공원 당골광장에 숙소가 많다. 강력추천은 태백시가 운영하는 태백산민박촌(553-7460). 값도 싸고(2만 5,000원부터) 정갈하다. 가스 렌지와 싱크대가 있어 식기를 가져가면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호텔 메르디앙(553-1266) 우진모텔(553-6448) 등이 있다. 당골광장에는 큰 식당가가 있는데 어느 식당에서나 민박을 친다.
먹거리
정선의 동면 화암관광지와 태백시에 먹을 것이 많다. 화암관광지의 화암약수터 내에는 화암장가든(033-562-2374)이 있다. 약수와 황기를 이용한 약수황기백숙이 유명하다. 태백시는 도축장이 있는 곳. 고산에서 자란 청정 한우를 이 곳에서 도축한다. 그래서 태백시는 소고기가 유명하다. 인근 삼척시나 동해시민들이 태백 한우를 먹기 위해 원정을 오기도 한다. 시내에 고기집이 많다. 어느 집에 들어도 만족한다. 삼수동에 있는 충남실비집(552-5074) 등이 현지인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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