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생각지도 않던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영화나 소설에나 나옴 직한 일들이 가끔은 리얼리티를 가진 실제 현실의 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영화로 데뷔하게 된 게 바로 그랬다. 어느날 김기영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나 박상호 감독 친군데 영화 좀 같이 하지." '하녀'(下女), '충녀'(蟲女), '화녀'(火女) 시리즈로 한국 영화사에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로 기억되는 김기영 감독은 오빠의 친구였다. "전 못해요, 할 생각도 없고요." 오빠가 영화 감독이었지 나는 엄연히 연극 배우였다. 내 입에서는 자연히 못하겠다는 소리가 나왔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영화 '충녀'(蟲女)의 촬영 현장에 서 있었고, 그날 이후로 남궁원, 전계현 등과 같이 '김기영 사단'의 일원이 됐다. '충녀' 는이교수(남궁원)가 노이로제 증상을 보여 정신 병원에 입원한 뒤 여고생 명자(윤여정)의 기괴하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그 영화에서 나는 보스 기질을 가진 뒷골목 술집 주인 역을 맡았다.
김기영 감독은 다음 번엔 아예 비중 높은 조연을 시켰다. 단역 출연 한번에 주역으로 격상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나인데 영화라고 다르랴"하는 단순 무식한 자신감은 가득했다. 게다가 나는 감독이 좋으면 그 영화를 무조건 신뢰하는 버릇이 있었다. 배역이 흉한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내 데뷔작이 된 75년 작 '육체의 약속'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리바이벌한 영화였다. 늘 그랬듯 정일성 선생이 촬영 감독을 맡았다. 내가 맡은 역은 그야말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형무소의 간수 역이었고 김지미, 이정길씨가 각각 주연을 맡았다.
첫날 촬영은 서울역에서 했는데 마지막 장면을 찍었다. 처음부터 기승전결이 있는 연극과 너무 다른 이 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관객 대신 카메라만 앞에 두고 연기하는 게 얼마나 어색하던지.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인 채 그저 영화를 찍었을 뿐이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내내 그랬다. 영화적 연기를 몰랐던 나의 촌스러움 때문이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으로 나는 이 영화로 75년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상호 오빠는 "영화 배우가 평생 영화를 해도 못 타는 상을연극 배우가 그렇게 쉽게 타도 되느냐"고 놀려댔다. 장난 섞인 말이었지만 나로서는 정말 염치가 없었다. 영화와의 인연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나는 '육체의 약속' 을 포함, '이어도' '한네의 승천' '금병매' '과부춤' '자녀목'까지 모두 열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리고 75년에 이어 꼭 10년 뒤인 85년에 또 한번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탔다. 우리 오빠 아래서 조감독을 오래 했던 정진우 감독의 영화 '자녀목'에 전무송, 원미경과 같이 출연해서였다. 그러고 보면 영화에 꽤 많은 빚을 진 셈이다.
그래서일까? 부산 영화제가 태어난 이래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딸과 함께 영화제에 참석해 왔다. 김동호 위원장과의 친분도 친분이려니와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부채 의식을 덜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올해는 부산을 찾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공연 날짜와 부산 영화제 개막 일정이 겹쳐서였다. 김동호 위원장은 "어떻게 그럴 수있느냐"고 서운해 했지만 영화보다는 연극이 내 생의 우선 순위인 걸 어째.
그래도 골수 영화 팬으로 영화보기를 게을리 한 적은 결코 없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요즘이다. 오죽하면 손오공처럼 머리카락을 흩뿌려 분신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까지 할까. 그래도 영화관은 꼬박꼬박 찾는다. 최근 '러브 액츄얼리' '올드보이' '프리다' 등을 보았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노라면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샘솟으니 그리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혹시영화가 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세찬 비난을 퍼붓진 않는다. 단 한 컷을 위해 감독과 스태프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너무 잘 아니까. 싸늘한 힐난대신 이 자리를 빌어 한때 동업자였던 영화인들에게 경의와 찬사를 표한다. 또 지금도 뛰어난 감독의 작품이라면 단역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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